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17)

프랑크푸르트(Frankfurt): 1000년 제국의 도시, 근대 독일의 탄생지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 뢰머(Römer)광장에서 2

지난 회에서는 구 시청사인 뢰머 건물 테라스 위에 설치된 4 황제 석상까지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발길을 마인강 쪽으로 돌려 뢰머광장을 계속 살펴보도록 한다.

뢰머건물 앞에서 뢰머 광장을 살펴보면 10m정도 오른 쪽에 광장 바닥에 원형 동판이 설치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독일판 분서갱유 사건인 나치시대의 “분서”의 현장이다.

프랑크푸르트 분서(焚書)의 현장: Bücherverbrennung Römer

1933년 독일의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5월 10일 베를린을 비롯 전 독일에서 이른바 “비독일적인” 사상가들의 서적을 불태우는 분서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독일의 선전장관인 괴벨스의 주도로 진행된 분서사건은 국민들의 획일화와 세뇌를 위해 “비독일적인 영혼을 정화시킨다(Aktion wider den undeutschen Geist)“는 명분으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1933년 5월 10일 독일 대부분의 대학에서 나치당원들이 성화를 들고 광장을 돌면서 비독일적인 서적에 대한 분서 행진을 벌였다. 학생들은 책을 광장 중앙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프랑크푸르트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5월 10일 밤 9시 15,000여 명이 뢰머 광장에 운집하였고, 독일 대학생연합(Deutschen Studentenschaft) 주도로 이른바 불온한 서적들이 불태워지기 시작하였다.

불온한 사상가들이라 하였지만, 대다수가 유대인 출신, 죄파 지식인, 나치에 반대하는 인물들의 작품으로, 하인리히 하이네, 하인리히 만, 스테판 츠바이크, 베르톨트 브레히트, 에리히 케스트너 등 약 1만 8천 종의 책이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올라 분서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68년의 세월이 지난 2001년, 프랑크푸르트 시는 뢰머광장에서 분서가 자행된 사건을 상기(Zum Gedenken am 10.05.2001 – 68 Jahre nach dem Tag des Ereignisses)시키는 동판을 제작하여 그 현장에 설치하였다.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며 이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독일의 대표적 민요 ‘로렐라이’의 가사를 지은, 그리고 분서의 대상이 되었던 하인리히 하이네는 마치 이 사건을 미리 예견하였던 것처럼, 분서 사건 100년도 훨씬 전인 1821년 자신의 작품 『Almansor』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고 있다.

“Das war ein Vorspiel nur, dort wo man Bücher Verbrennt, verbrennt man auch am Ende Menschen. (그것은 단지 서막이었다. 책을 불태우는 그곳에서, 결국 사람도 불태우게 될 것이다.)”

하이네의 이러한 예언처럼 나치에 의해 자행된 분서사건은 결국 이후 유럽 유대인 대학살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Haus Werthym: 구시가지 유일의 Fachwerk 건물

뢰머에서 마인강가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새로 단장한 프랑크푸르트 시 역사박물관 앞에 Haus Werthym이라는 독일 전통 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Haus Wertheym은 독일 중세시대 전통 건축양식인 Fachwerkhaus로 현재도 원형 그대로 보존된 상태로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Haus Wertheym은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그저 일반적인 건물에 불과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에는 1,250여 채의 Fachwerkhaus가 있었고, 그 화려함이나, 용도 등에서 Haus Wertheym은 평범한 일반 건물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가 2차대전 당시 75차례에 걸친 공중폭격으로 시의 80% 가까이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고, 특히 뢰머를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 건물들은 뼈대만 남겨질 정도로 그 피해가 엄청났으며, 이 와중에 1250여 채에 달했던 구시가지의 Fachwerkhaus들은 모두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러한 폭격 속에서 Haus Wertheym은 다행이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이로서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에서 유일하게 Fachwerkhaus 건축 원형이 보존된 건축물이 되었고, 프랑크푸르트 시는 1963년 시의 문화유적지로 지정하였다.

Haus Wertheym은 1383년 처음 사료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Haus Wertheym은 Alte Mainzer Gasse의 모퉁이 건물을 지칭하였던 것이고, 이후 1456–1460년 경 확대 증축되었다.

현재 우리가 보고있는 Haus Wertheym은 1600년 경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구시가지 건물의 이름처럼 Haus Wertheym도 건물 주인의 출신지에서 명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다른 Fachwerkhaus 건축물보다 그 구조가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보아, 당시 자주 열렸던 시장과 무역박람회를 위한 창고용도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1700년 경 부터는 도시 경비를 위한 세관 및 경비실로 사용되었다.

Eiserner Steg: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의 자부심

Haus Wertheym에서 마인강을 바라보면 철골 구조로 된 보행교를 접하게 된다. Eiserne Steg이 그 주인공이다. 1868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869년 완공된 이 Eiserne Steg은 천년 제국의 도시이자, 자치시인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의 자부심이 깃들여 있는 다리이다.

1866년 벌어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고, 프랑크푸르트는 프로이센에 귀속되게 된다. 프랑크푸르트의 상징성으로 인해 당시 프로이센의 황제 빌헬름1세는 프랑크푸르트 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당시 프랑크푸르트 시의 현안인 새로운 다리건설을 기꺼이 지원하려 하였다.

당시 프랑크푸르트 인구 1800년 당시 35,000여 명에서 1840년에는 57,000여 명으로 증가하게 되고, 당시 Alte Brücke만이 유일하게 프랑크푸르트의 남쪽인 작센하우젠과 구시가지인 북쪽 지역을 이어주는 다리였기에, 새로운 다리 건설이 프랑크푸르트 시에게는 매우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은 빌헬름 1세의 제안을 거절하고, 1867년 6월 새로운 다리 건설을 위한 협회를 구성하고, 연 5% 이자를 전제로 한 모금활동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모금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이듬해인 1868년 착공에 들어간 다리 건설은 2년이 채 안된 1868년 완공이 되었다. 완공된 Eiserne Steg을 건너는 보행자에게 통행료를 부과하였고, 건설비를 모두 회수한 1885년 마침내 통행료는 폐지되었다.

이러한 건설에 얽힌 사연으로 이후 Eiserne Steg은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Ernst Ludwig Kirchner, Max Beckmann, Karl Tratt 등 1910-1930년 사이 표현주의 대가들의 작품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불행이도 Eiserne Steg는 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1945년 3월 두 동강으로 잘려 파괴된 아픔이 있다, 전후 1946년 당시 22만 마르크의 경비와 매일 10,000여 명의 인력으로 이전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이후 1993년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끝으로 Eiserne Steg 다리 위 그리스어 현판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다음 행선지로 떠나도록 한다.

다리 초입 철골구조물에 설치된 그리스어 현판은 1999년 괴테 탄생 250주년을 맞은 프랑크푸르트 시가 괴테를 기리며, 문학(또는 문화)의 개방성을 상징하려 설치한 것이다.

“ΠΛΕΩΝ ΕΠΙ ΟΙΝΟΠΑ ΠΟΝΤΟΝ ΕΠ ΑΛΛΟΘΡΟΟΥΣ ΑΝΘΡΩΠΟΥΣ”는 서양 문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작가 호머의 오디세이아(Odyssee I, 183)의 한 문장이다. 대략적으로 “와인 색과 같은 저 검붉은 바다를 건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그들에게 가려한다”고 번역 해 볼 수 있다.

박물관 거리(Museumsufer)

Eiserner Steg 너머 마인강변에는 Museum Angewandte Kunst (구 Museum für Kunsthandwerk)과 그 옆으로 여러 특색 있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박물관 거리(Museumsufer)이다. 이번 역사 산책에서 박물관 거리를 살펴보지 못하는 점이 참 아쉽다. 시간이 있는 참가자들은 역사산책을 마친 뒤, 방문해 보는 것을 적극 권해본다.

베를린에 박물관 섬(Museumsinsel)이 있고, 뮌헨에 예술특구(Kunstareal)가 있다면 프랑크푸르트에는 마인강 양안에 자리잡은 박물관 거리가 있다.

박물관 거리는 동서로 흐르는 마인강의 좌편 즉 남쪽 강변의 Eisernen Steg에서 Frieden다리 (Friedensbrücke)까지의 양안에 총 15개(남쪽 9개, 북쪽, 뢰머 광장쪽 6개)의 박물관들이 있다.

박물관 거리 조성은 1977년 당시 프랑크푸르트 문화행정관(Kulturdezernent)인 호프만(Hilmar Hoffmann)에 의해 시작되었다. 호프만의 “박물관 거리 조성” 프로젝트는 프랑크푸르트를 문화의 도시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20여년에 걸쳐 기존 박물관들을 확장하고, 원래 별장들이 많던 이 지역에 새로운 박물관을 건축하고, 거리를 정비하면서 박물관 거리가 만들어졌고 프랑크푸르트는 문화의 도시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마인강 양안에 위치한 박물관들은 다음과 같다.

* 북쪽 강변(뢰머 광장 주변)
Jüdische Museum,
Historische Museum,
Kunsthalle Schirn,
Museum für Moderne Kunst(MMK),
das Museum Judengasse,
Archäologische Museum

* 남쪽 강변( Sachsenhausen 쪽)
Deutsches Architekturmuseum, Deutsches Filmmuseum, Ikonen-Museum an der Deutschordenskirche,
Liebieghaus (조각박물관), Museum Angewandte Kunst (구 Museum für Kunsthandwerk),
Museum der Weltkulturen (구 Völkerkundemuseum), Museum für Kommunikation (구 Bundespostmuseum)
Museum Giersch (예술과 종교 박물관), Städel Museum

1210호 20면, 2021년 3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