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미술사, 회화 중심으로 살펴보기 (14)

20세기의 회화

이전 연재에서 살펴본 것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로 분류되는 화가들은 이전의 관습화된 화풍을 버리고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는데 집중했다.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되자, 이러한 새로움을 시도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피카소, 뒤샹 등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서 계속 확대, 발전되었고, 그 결과 유럽 현대 회화(모더니즘 회화)의 전성기를 만들게 된다.

특히 후기 인상주의는 이후 20세기 표현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표현주의란 인간의 내면의 감정과 감각의 표현과 구성에 주목하는 경향으로. 사실상 후기 인상주의, 추상주의, 상징주의, 입체파 등 20세기 전반의 회화 사조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20세기 이후의 회화 사조를 발생시대 순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청기사파(Der Blaue Reiter, 1911-1914)

청기사파는 뮌헨에서 발생한 화풍으로 1911년부터 1914년까지 활동한 표현주의 화풍 중 하나로, 대표적인 화가는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아우그스크 마케(August Macke), 파울 클레(Paul Klee), 야블렌스키(Jawlensky) 등이 있다. 이들은 키르크너(Ernst Kirchner) 등이 결성한 다리파( Brücke,1905~1913)와 함께 유럽에서 표현주의의 정착에 기여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의 시작한 1914년 칸딘스키가 러시아로 소환되고 같은 해 마케(Macke)가 상파뉴 전선에서 사망, 1916년 베르덩 전선에서 마르크(Marc)가 사망하면서 살해당하면서 청기사 파는 그 종말을 맞았다.

청기사파는 푸른 색에 대한 선호와 기사의 낭만적 상징이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1912년 피퍼 서점에서 <청기사> 잡지를 발간하며 그 이름을 얻게 되었고, 색과 추상을 통해 내면적 진실을 표현할 것을 추구했다. 마르크에게 말을 비롯한 동물은 순수한 영혼성을 대표했고 칸딘스키는 푸른색을 현대의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시원의 색으로 보았다.

청기사파의 틴생

바실리 칸딘스키는 1911년 프란츠 마르크, 아우구스트 마케, 파울 클레, 그리고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와 함께 청기사파(Der Blaue Reiter)를 조직해 뮌헨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1930년 칸딘스키가 회상한 바에 따르면 ‘청기사’라는 명칭은 마르크가 살았던 진델스도르프(Sindelsdorf)의 뒤뜰에서 두 화가가 커피를 마시다가 생각해낸 이름이라고 한다. 마르크가 좋아하는 말, 칸딘스키가 좋아하는 기사 모티프에 둘이 다 좋아하는 청색을 더해서 즉흥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칸딘스키는 1912년에 출간한 저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에서 “푸른색은 심화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인간을 무한의 세계로 이끌어 들이고, 순수에 대한 동경과 드디어는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동경을 인간에게 일깨워 준다. 푸른색은 하늘의 색깔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마르크에게 동물이 영적인 순수함의 상징이었다면 칸딘스키에게 청색은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정신성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기사파의 특징

예술활동에 있어 통일된 강령이나 주제는 없었지만, 청기사파의 화가들은 모두 정신성을 표현하기 위해 중세 미술과 원시 예술을 참고했으며 야수파, 입체파 화가들과의 조우를 통해 추상화의 방향으로 진전해 갔다

표현의 자유가 중시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상징과 기법이 공존했는데, 마르크는 동물, 칸딘스키는 형태의 음악성, 클레는 환상주의, 그리고 마케는 강렬한 색채를 중시했다.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 <정신성과 예술(1911)>에서 색이 표현되는 주제와 무관하게 인간의 정신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색은 건반이고, 눈은 망치요, 영혼은 여러 개의 줄을 가진 피아노다. 예술가는 그것을 연주하는 손으로, 영혼에 파장을 일으키기 위해서 건반을 건드리게 된다.”

청기사파의 경향은 내면의 진실이나 내면의 감동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선, 색, 형태를 왜곡시키는 것을 불사하며 색채에 상징적 의미를 주고, 독일고대의 낭만적 심성을 화면에 형상화하는 것으로, 제작자의 내면 표현을 존중함으로써 추상화로의 길을 가게 된다.

표현주의의 다른 유파인 야수파나 다리파가 인간 내면의 ‘본성’에 초점을 두었다면, 청기사파는 내면의 ‘정신성’에 초점을 두었다.

1911년부터 1912년까지는 청기사파 뮌헨에서 두 번의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첫 전시회는 탄호이저 화랑(Thannhauser-Galerie)에서 열렸고 두 번째는 골츠(Goltz) 화랑에서였다.

Lenbachhaus : 청기사파의 작가들의 고향

사제지간이자 연인이었던 Münter와 Kandinsky가 함께 살았던 바이에른 무르나우(Murnau)의 집은 “Münter Haus”가 되었다. 칸딘스키가 러시아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재혼을 하자 뮌터는 칸딘스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소장하고 있던 칸딘스키의 그림들을 돌려주지 않았다. 뮌터는 생애 마지막까지 무르나우에서 살았고, 1962년 85살의 나이로 무르나우에서 생을 마감했다.

1957년 Gabriele Münter는 80회 생일을 맞아 전시회를 갖고 Kandinsky와 Münter 자신의 수많은 작품과 청기사파 동료들의 작품을 Lenbachhaus에 기증하였다. 이 기증을 통해 Lenbachhaus는 청기사파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을 발돋움하게 되었다.


지난 해 6월부터 시작된 연재 “이달의 전시”는 코로나 19로 인한 미술관과 박물관 폐쇄가 해제되는 시기까지 잠정 중단합니다.
교포신문사는 “이달의 전시” 연재와 연관하여, 미술관 관람이 허용되는 시점까지, “유럽의 미술사, 회화 중심으로 살펴보기”를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미술관의 작품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1221호 28면, 2021년 6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