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103)

한국 여성계의 선각자들 ①

19세기말과 20세기 전반의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불행히도 일제의 식민지 시대와 맞물려, 우리의 민족정기와 역사가 왜곡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식민지 시대라는 외적 요인과 더불어 유교를 숭상한 선비의 나라 조선의 몰락, 그로 인해 유교의 장점보다는 부작용만이 우리 정신을 지배하던 20세기 전반의 우리 민족은 내적으로도 시대정신을 잃은 채 방황하던 시기였다.

문화서옵단의 문화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어려운 시대에서 남존여비라는 봉건적 사고방식에 항거하며 여성도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임을 선언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하여 한국 여성계에 새로운 지표를 제시한 여성으로 나혜석, 윤심덕, 최승희, 노라노 4인을 선정하여 그들의 삶과 활동을 소개한다.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나혜석(1896~1948 호는 정월(晶月))은 수원의 명문가 딸로 태어나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또한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화가이다.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큰대문 참판댁」의 4남매 중 셋째로 부유한 개명관료의 가정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신학문을 공부한 두 오빠 나홍석, 나경석과 아버지 나기정의 권유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 유학했다.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에 반하여 학업을 중단하여 1년 간 스스로 돈을 벌어 학교를 마친 그녀는 서울로 돌아와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유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일반 대중의 삶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차례 특선과 입선을 하기도한 재능있는 화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일본유학생, 우리나라 최초의 이혼녀,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 여행한 여성. 그녀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이처럼 정월 나혜석은 우리나라 근대화 시기의 대표적인 신여성이라고 해도 잘못된 표현이 아니다.

나혜석은 김일엽 등 다른 신여성들처럼 여성들의 교육을 강조했으며, 초기에는 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닌 페미니즘을 내세우다가 점차 남녀성평등을 통한 자유연애, 개방 결혼과 독신주의 등을 주장하며 급진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작품 활동을 통해서 많은 여성들의 자각을 일깨웠으며 여성 운동과 그에 따른 편견을 바꾸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여성도 인간이다

일본 유학 시절, 나혜석은 성적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유학생 사회에서 여성화가, 여성문인으로서도 빛을 발했다.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은 그녀가 자유롭고 주체적인 사상을 가지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남성과 다르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가치를 깨닫고 재일본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에 계몽적 논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는 미술이라고 하면 동양화만을 떠올리던 때였다. 일반인들의 서양화에 대한 이해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혜석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미술활동을 펼쳤다.

1921년 나혜석은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첫 유화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에 당시로서 놀라운 숫자인 5천 명의 인파가 다녀갔다. 그들은 나혜석의 그림보다는 생소한 서양화를 여자가 그렸다는 점, 그 여자가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점, 변호사 김우영이 작가의 남편이라는 점에 더 관심이 많았다.

나혜석은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서양화를 소개하고, 서양화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그녀는 전시회에 임하는 소감을 쓴 기고문, 「회화와 조선여자」에서 여성이 미술을 하는 것에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의 ‘운동’으로서 개인전을 연다고 밝히고, 그림을 그리는 여성이 없음을 애석해했다. 여성들의 주체적 활동에 대한 나혜석의 신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주체적 여성은 그녀의 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나혜석의 첫 소설 「경희」에는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 여자다. 그러나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성도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자립적으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녀는 출산 후, 신문에 기고한 「母된 감상기」에서 사회와 남성에 의해 강요된 모성의 허구성에 대해 주장하기도 했다. 김우영과의 이혼 후에 발표한 기고문, 「신생활에 들면서」에서는 정조란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지 강요할 것이 아니라고 밝혀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또 나혜석은 자신의 해외체류 경험을 쓴 글을 통해 자립적이고 자유로운 외국 여성의 삶을 우리나라 여성에게 보여주려 했다

나혜석은 화가로서 작가로서 그리고 사상가로서 뚜렷한 자기세계를 구축한 여성이다. 그녀의 그림과 글은 당시의 남성화가, 남성작가와 비교해도 매우 뛰어나다. 이렇게 뛰어난 그녀의 작품들이 그 동안 평가절하된 이유는 그 시대가 그녀의 사상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보다 100년 앞서서 여성의 주권을 깨달은 그녀는 그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각자로서의 자신의 의무에 나혜석은 늘 충실했다.

당시로서 용납될 수 없었던 최린과의 연애사건은 결국 나혜석을 이혼에 이르게 했다.

이혼 후, 나혜석의 삶은 불행했다. 이혼녀 나혜석의 그림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김우영과 최린은 그녀에게 경제적으로 조금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김우영의 제지 때문에 그녀는 아이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빈곤하고 외로운 가운데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신분을 감춘 채 홀로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 에도 남아 있지 않다.

1287호 22면, 2022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