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나 (재독 시인, 수필가)
가을 햇살이 따스한 어느 토요일, 독일에 온 지 36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 중부 도시인 카셀을 방문하였다. 카셀에 사는 선배님이 이번에 열리는 동창 모임에 꼭 참석했으면 좋겠다고 초청하였다. 독문과 후배라고 특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여러 번 초청하는 선배의 열성에 밀려서 모임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약 세 시간 걸려서 카셀 빌헬름스회에(Kassel-Wilhelmshoehe)역에 도착하였다. 역까지 마중 나온 선배 차를 타고 얼마 가다가 주차하였는데 거리 이름이 적힌 표지판에 `Jakob Grim (1785-1863) Wilhelm Grim (1786-1859) 거리´라고 쓰여 있었다. 아마 그 거리 어딘가에 그림(Grim) 형제가 살았던 듯싶었다.
옛날에 군수 사업이 발달한 도시여서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많이 받았던 도시라는 선배의 설명을 들으면서 시내로 걸어갔다. 계단 양 입구에 황금색 사자상이 세워져 있는 고풍스러운 시청을 지나서 시야가 탁 트이는 널찍한 정원이 펼쳐진 프리데리치아눔(Fridericianum) 박물관 앞으로 갔다. 이 박물관은 1779년에 완공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중의 하나이며 세계적인 현대미술 전시회 ‘도큐멘타(Documenta)’가 열리는 메인 전시장이기도 하다.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 오스트리아 빈 (Wien), 인스브루크 등에서 먼 길을 달려온 동창들이 그곳에 와있었다.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만나지 못했던 동창들과 반가운 해후를 하였다. 선배는 우리를 오랑제리(Orangerie)라는 곳으로 안내하였다. 노란색의 우아한 건물과 너른 정원이 꼭 파리 로댕 박물관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프랑스풍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하였다.
카알(Karl) 제후(1654-1730)가 18세기 초에 지은 궁전으로 수많은 오렌지 나무와 월계수가 겨울에 이 궁전 안에 보관되어 추위를 피했다고 해서 `오랑제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전쟁으로 궁전이 불타고 새로 복원된 건물로서 지금은 천체 물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계단으로 올라가는 벽면에는 <1162년 기독교 창조 그림>, <1493년 지리학상의 세계 그림>, <16세기 코페르니쿠스 worldsystem> 등 오래된 천체 사진 액자 여러 개가 걸려 있었다. 천문학이나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자녀들이나 학생들을 데리고 오면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았다.
지난 여름에 도큐멘타가 열렸을 때 이 오랑제리의 너른 정원에서도 미술품 전시가 열렸다고 한다. 도큐멘타는 1955년부터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며 100일 동안 열리기 때문에 ‘100일 미술관’이라고도 불린다. 세계 현대미술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글로벌 이벤트 전시회이다. 이때는 약 서른 군데 전시장소에서 미술 작품이 전시되므로 카셀시 전체가 거대한 미술 전시장이 된다고 한다.
오랑제리 정문 앞에서 이십 대 시절로 돌아가 두 팔을 올리거나 다리를 옆으로 뻗으며 자유를 구가하는 사진 몇 장을 찍고 나서 산상 공원으로 차를 타고 갔다. 차에서 내리니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여유롭게 떠다니고 붉은색과 주홍색, 노란색이 어우러진 단풍잎들이 가을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저만치 하늘을 머리에 이고 구름 아래 우뚝 서 있는 헤라클레스상을 향해 울창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언덕을 올라갔다. 카셀의 랜드마크라고 하는 베르크 파크 빌헬름스회에 (Bergpark Wilhelmshoehe), 우리말로 하면 빌헬름 언덕 산상 공원이다. 유럽 최대의 산상 공원으로 그 넓이가 축구장 350개 정도에 달한다고 하니 얼마나 큰 규모인지 상상이 될까?
이 공원 안에는 사자성, 헤라클레스상, 바로크 양식의 인공 폭포, 빌헬름스회에 궁전 등 예술적 건축물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카알 제후 (재위 기간 1677-1730)가 여름 궁전으로 지었던 곳에 빌헬름 1세(1797-1888)가 확장하여 만들었는데 1696년부터 약 150년에 걸쳐 지어진 인공 폭포와 수로가 손꼽히는 건축물이다. 이 산상 공원은 201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해발 526m인 곳에서 내려다보니 대형사진처럼 펼쳐진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팔각형 모양으로 지어진 성벽 꼭대기에 높이 8,25m의 거대한 헤라클레스상이 세워져 있었다. 제우스와 미케네 왕의 딸 알크메네 사이에 태어난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막강한 힘과 용기, 지혜 등으로 남자다움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영웅이다. 당시 카알 제후는 이 헤라클레스상을 세움으로써 자연에 대한 예술의 승리와 인간의 창조적인 힘을 보여주려고 하였다고 한다. 1717년에 완성된 이 동상은 카셀시의 수호자처럼 300년 이상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동상 아래로부터 ‘카스카덴’이라는 인공폭포에서 물이 흐르는데 그 폭이 약 12m이며 길이는 약 250m에 이른다. 매년 5월 1일에서 10월 3일까지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 오후 2시 반에 물이 흘러내린다. 밤에는 조명까지 켜져서 ‘물의 쇼’라고 불린다.
이 수로가 끝나는 아래쪽 끝에 빌헬름스회에 궁전이 보였다. 중앙 본관을 중심으로 양쪽에 두 날개를 펼친 듯한 건물이 붙어있어 고풍미를 풍기고 있었다. 이 궁전에서 헤라클레스상 쪽을 바라보면 산꼭대기에서 흐르는 계단식 인공 폭포가 아래 연못에 모이고 이 물이 다시 수로를 따라 산 아래로 흘러가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묘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아쉽게도 물의 쇼를 볼 수 없는 때였다.
이 산상 공원을 내려오면 그림 형제 박물관이 있다. 그들의 생가는 프랑크푸르트 근교 하나우(Hanau)이지만 후에 카셀에 살았기 때문에 이 도시에 박물관이 세워졌다. 이번에 미처 이 박물관을 들르지 못하고 왔는데 언제 한번 <헨젤과 그레텔>, <백설 공주> 등의 동화를 모으고 썼던 이 위대한 형제의 박물관을 방문하리라. 그리고 오랑제리 정원과 유럽 최대의 산상 공원을 천천히 산책하면서 꽃의 노래, 숲과 바람의 소리를 들어보고 궁전과 정원, 박물관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오랜 역사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보리라.
약 20만 명이 사는 소도시, 2차 대전 때 무자비한 폭격을 받았던 도시이면서도 수많은 문화 예술가, 학자와 정치가, 시민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카셀은 이제 도큐멘타, 그림 형제 박물관, 빌헤름스회에 산상 공원 등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글로벌 문화도시, 예술 도시로서 자리매김하며 오랜 역사와 예술의 빛을 뿜고 있다.
1287호 23면, 2022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