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8)

눈 뜨고 못 볼 히틀러의 ‘퇴폐 예술’ 광기 ④

■ 히틀러가 ‘총통미술관’을 린츠에 세우려는 이유

1889년 4월 독일 접경지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인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11세부터 18세까지 린츠에서 살았다. 린츠는 그의 출생지와 가깝고, 소년 시절의 기억이 선명한 곳이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다음 린츠를 방문했을 때 시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전쟁이 끝나면 부모의 무덤이 있는 이곳에서 은퇴 생활을 보내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싫어했던 도시 빈을 지우고, 린츠를 베네치아나 부다페스트에 버금가는 문화 예술의 도시로 바꾸고 싶어 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자랐고, 자신을 지지해준 도시를 미화하고 싶은 욕망에 린츠를 새로운 계획도시, 이른바 ‘총통시(Führerstädte)’로 만들려고 구상했다.

린츠에 설립하려는 총통미술관의 작품 수집 책임자로 히틀러는 1939년 6월 미술사학자인 드레스덴 미술관 관장인 한스 포제(Hans Posse, 1879~1942)를 임명하면서 ‘린츠 특별임무’를 맡겼다. 작품 수집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 전역에서 매입과 약탈, 절도 등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히틀러의 개인 큐레이터가 된 포제는 유럽의 명화를 모으기 위해 자동차는 물론 전용 열차와 특별 비행기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는 1941년 3월 파리와 로마,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작품을 구매하려고 852만 라이히스마르크(RM)를 썼다고 보고했다.

그는 3년 만에 유럽 최고의 명작 2500점을 모았다. 포제는 1942년 12월 구강암으로 사망했고, 그의 장례식은 히틀러가 참석하고 괴벨스가 추도사를 하는 등 국가행사로 치러졌다.

히틀러는 역사상 예술품 구매에 가장 많은 돈을 쓴 인물로 꼽힌다. 물론 국가 돈이지만 모두 1억 6400만 마르크를 썼다고 한다. 히틀러는 또 자신의 사진이 들어간 엽서와 우표 등에서 받은 초상권 사용료와 저작물 인세 등으로 벌어들인 상당한 돈도 작품 구입에 사용했다.

■ 역과 연결된 ‘총통미술관’ 갤러리 길이는 36킬로미터

다행스럽게도 실현되지 않은 총통미술관 계획을 보면 그 규모와 컬렉션에서 세계 최대였다. 총통미술관은 히틀러의 스케치와 구체적인 지시에 따라 건축가 로데리히 픽(Roderich Fick, 1886~1955)이 설계했다.

설계상으로 총통미술관은 린츠역에 붙어 있다. 이런 설계 구조는 약탈이나 강탈 절도 매수한 예술품을 기차로 한꺼번에 운반해 미술관을 채우기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건물 정면은 152m로, 기둥이 늘어선 신고전주의(Neoclassic) 양식이다. 갤러리의 총길이는 약 36km로 계획되어 있었다. 현재 세계 최대 박물관이자 거대한 미로인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V&A 박물관’의 갤러리 길이 8km와 비교하면 총통미술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총통미술관이 계획대로 완공되었다면 2 만 7000점을 전시할 수 있다. 미술관 모델은 1945년 1월 완성되었고, 완공 시기는 1950년으로 계획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미술관 옆에는 초대형 극장, 콘서트홀, 25만 권을 갖출 수 있는 도서관, 오페라 하우스, 영화관, 호텔 그리고 연병장 등이 들어서는 복합 문화단지를 구상했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에 패색이 짙어지자 벙커에서 피신 생활을 했던 히틀러는 미술관 미니어처 모형을 보면서 조용히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히틀러 비서들에 따르면 그는 총통미술관에 관해 끊임없이 말하고, 종종 오후 차담화 때 대화 주제로 삼았다. 어떤 그림을 어디에 어떻게 걸고, 그림과 그림 사이의 공간은 얼마나 하고, 조명은 어떻게 할지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히틀러는 패배가 다가오자 이를 보는 것으로 도피처로 삼은 듯했다.

베를린 함락 직전, 히틀러가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다음 날인 1945년 4월 30일 권총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총통미술관 건립의 꿈도 사라졌다. 그는 자살 직전 수년간 자신의 전용기 조종사로 일한 한스 바우어에게 감시의 표시로 총통 관저에 걸어두었던 프리드리히 대제 초상화를 선물했다.

독일 중부 포츠담에 최초의 유대교회당을 세우도록 허락한 프리드리히 대제가 “유대인을 억압하는 정부는 절대 번영하지 못한다”라고 했던 말을 히틀러는 결코 기억하지 못했다. 히틀러는 유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나치스 당에 넘기며 당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국가에 헌납하라고 남겼다.

나치 약탈 예술품을 수집한 건 히틀러만이 아니었다. 나치 이인자 괴링과 나치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 1893~1946) 등도 개인 컬렉션을 구축하고자 점령지에서 군대를 이용해 작품들을 약탈해 모았다. 히틀러나 괴링이 원하지 않은 예술품들은 다른 나치 간부들에게 돌아갔다.

히틀러와 나치를 숭배하던 간부들은 예술품을 수집하는 것이 자신의 교양과 문화 수준뿐만 아니라 “몰락과 오염에서 벗어나 순수하고 강인한 새로운 독일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나치의 정치적 야망에 동의하는 수단이라고 믿었던 듯했다.

1287호 30면, 2022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