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27)

“모나리자를 지켜라” 루브르의 특급 비밀작전 ➂

약탈품 반환의 역사는 깊다.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 유명 정치인이자 작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기원전 73년부터 3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지낸 베레스(Gaius Verres, BC 120?~BC 43)를 유물과 예술품을 훔쳤다며 재판에 넘겼다. 전쟁이 아닌 평화시의 약탈과 절도이지만 베레스는 ‘로마에 대한 불충’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판결 직후 그가 시칠리아 사원 등에서 탈취한 유물들은 그대로 복원되었다. 문화재와 예술품 반환의 최초 기록 사례다. ‘정복 제국’ 로마에도 반환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속속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을 찾아간다. 특히 반환 문제가 제기된 예술품과 문화재 소장자가 그 취득 경위와 역대 소장자의 획득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워싱턴 원칙’ 합의 이후 나치 시대 약탈품의 회복이 가속화하고 있다.
약탈 문화재 환수는 유물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 변경이나 한 나라의 컬렉션 부족 부분을 채운다는 문화적 자존심 높이기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제자리 찾기라는 도덕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약탈에 스며든 역사적 핏빛 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힐링의 길이다.

■ 모나리자와 헷갈린 누드 자매 ‘모나 바나’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셋째 부인(당시 24세)을 그린 미완성 상태의 초상화다 그녀는 1911년 절도 사건을 겪으면서 세계적인 명사 반열에 올랐다. 당시 한창 발전하던 활자 매체들에서 “신비하게 사라졌다”라거나 “현대의 가장 대담한 도둑”이라는 식으로 보도하면서 그녀의 명성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절도는 대낮에 발생했다. 1911년 8월 21일, 박물관이 문을 닫는 월요일이었다. 절도범은 전날 루브르에서 나가지 않고 화장실에 숨어 밤을 새웠다. 코트와 깨끗한 하얀 셔츠를 입은 그는 루브르의 르네상스 전시실 ‘살롱 카레Salon Carré’에 들어갔다. 벽에 걸린 모나리자의 나무 액자를 떼어내 코트를 벗어 그림에 둘렀다. 그러곤 모나리자를 감싼 코트를 옆구리에 끼고 파리 시내로 걸어 나왔다.

다 빈치의 16세기 명작 모나리자가 그 신비한 미소와 함께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26시간이 걸렸다. 다 빈치가 이 명화를 그린 것은 1506년이지만 피렌체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였다.

절도 사건의 첫 보도에서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모나리자 대신 ‘누드 모나리자’로 알려진 목탄 스케치화 ‘모나 바나(Monna Vanna)’를 잘못 게재할 정도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도난 당시 이 작품 가치가 500만 달러라고 보도했던 <워싱턴포스트>는 며칠 뒤 사진의 오보를 바로잡았다. 확인이 어려웠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워싱턴포스트>가 당당하게 밝힌 오보의 주인공 모나 바나도 모나리자를 그리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다 빈치가 그렸다는 주장과 그의 제자들이 그린 모나리자의 누드 복제화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110년 전 500만 달러는 현재 가치로 얼마나 될까. 절도 사건이 모나리자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과 평가를 바꿨다.

아무튼 박물관 후원자이자 아마추어 화가가 1911년 8월 22일 ‘라 조콘다’를 연구하기 위해 살롱 카레에 들어왔을 때 벽의 그 자리가 비어 있음을 발견했다. 루브르가 작품 촬영을 위해 그림을 가져가곤 했기에 경비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비상이 걸렸다.

그날 저녁 경찰이 절도 사건을 발표했다. 경찰은 48시간 이내에 몸값을 요구할 것이라며 기다렸지만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2년에 걸쳐 수사를 하는 동안 경찰은 모나리자 이미지 6500장을 뿌렸고, 4만 프랑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루브르는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벽을 비워 두었고, 사람들은 호기심에 이를 보러왔다.

한편 이탈리아에서 ‘V. 레오나르드(V. Leonard)’라는 인물이 모나리자 소유를 암시하면서 매매를 타진하려고 골동품 거래상과 접촉했다. 그 골동상은 조반니 포지 우피치 미술관장에게 알렸고, 포지가 1913년 12월 밀라노에서 문제의 인물을 만난 자리에서 그림이 진품임을 확인하고 안전한 보관을 위해 그림을 맡겨달라고 설득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경찰과 접촉했다.

모나리자를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한 포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우피치와 피티 미술관 등 피렌체에 있던 작품들을 옮겨 나치 약탈에서 구하는 데도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마침내 범인이 잡혔다. 잡고 보니 루브르박물관에서 인부로 일했던 이탈리아인 화가 지망생 빈센초 페루자(Vincenzo Peruggia, 1881~1925)였다. 그는 재판에서 모나리자가 처음 있었던 이탈리아로 돌려주고 싶은 애국심에서 절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빈센초의 이런 주장과는 달리 그는 훔친 모나리자를 이탈리아 정부에 반납하지 않았다. 페루자는 징역 1년 15일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탈리아에서 국가적 영웅이자 애국자로 인식되면서 복역 7개월 만에 풀려났다. 페루자는 유럽의 문화재와 예술품을 대대적으로 약탈했던 나폴레옹이 모나리자를 납치해간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모나리자는 다 빈치와 함께 이탈리아를 떠난 1516년부터 프랑스에 계속 머물렀다. 화가 지망생에게 납치된 모나리자가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가기 전인 1913년 12월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을 비롯한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순회 전시되는 등 짧게 여행했다. 그리고 1914년 1월 루브르로 돌아가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프랑스를 떠나지 않았던 모나리자는 외교 사절로서 미국과 일본, 러시아를 평화롭게 방문한 적이 있다.

루브르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모나리자, 어디있어요”

1308호 30면, 2023년 3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