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36)

구트만 가족의 회복 이야기 ➀

오락가락 회복 정책에 뭇매 맞는 네덜란드

■ 나치에 희생된 수집가 후손의 외로운 회복 투쟁기

네덜란드 은행가이자 유명한 예술품 수집가였던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외겐 프리츠 구트만(Friedrich Bernhard Eugen Fritz Gutmann, 1886~1944)은 나치 점령 기간인 1942년 자신의 컬렉션을 독일의 예술품 거래상들에게 강제로 팔아야 했다.

그의 아버지가 1872년 드레스드너 은행을 설립할 정도로 부유했던 가문에서 성장한 프리츠 구트만은 르네상스 시대의 귀금속을 포함해 19세기 후반까지의 예술품을 많이 수집했다.

구트만은 선조가 1800년대 후반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 전통적인 의미의 유대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배 민족은 혈통에 따라 엄격하게 정의된다’는 해괴한 이론을 주장하는 나치에겐 이런 정도의 종교적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네덜란드 정부가 보관 중인 약탈 예술품을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는 것을 업무로 삼는 네덜란드 회복위원회(Dutch Restitutions Committee)의 2011년 4월 11일자 결정문에 따르면, 프리츠가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하던 1941년 봄, 파리에서 활동하던 나치 예술품 거래상인 카를 하베르스토크가 구트만으로부터 소장품을 사기 위해 그의 저택인 네덜란드 하를럼 인근 헴스테데를 방문했다. 매매는 ‘강제 판매’였다. 프리츠는 많은 예술품을 강제로 팔았고, 1942년 나치 친위대 SS대장인 하인리히 히믈러에게 구명을 요청했다.

SS 장교들이 1943년 6월 26일 헴스테데에 와서 그와 부인 루이스를 “베를린으로 모시고 간다”면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이들은 체포되어 오스트리아 테레친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면서 구명 요청은 실패로 끝났다.

프리츠는 테레친에서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부인 루이스 구트만은 남편보다 조금 더 오래 살기는 했지만, 다시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그곳 독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의 컬렉션은 히틀러와 괴링에게 넘어갔다.

스위스로 시집간 딸 릴리와 영국에서 공부하던 아들은 나치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아들은 구트만이라는 성을 영어식 굿맨Goodman)으로 바꾸었다.

전쟁이 끝난 뒤 프리츠 구트만의 두 자녀 버나드 굿맨과 릴리 구트만이 헴스테데 자택에 갔을 때 모든 예술품이 강탈당한 것을 파악하고 네덜란드와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당국에 알리면서 회복에 나섰다.

1954~1960년까지 일부는 회수에 성공했지만, 수백여 점은 사라진 상태였다. 버나드는 199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할 때까지 두 아들 닉과 시몬에게 한 번도 할아버지의 컬렉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버나드의 유품을 정리하던 두 아들은 아버지가 모아두었던 서류와 편지 상자를 살펴보다가 생전에 아버지가 했던 일을 알았고, 이젠 이들이 할아버지의 유물 추적을 잇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영국 시민권자였던 버나드 굿맨은 나치가 강제로 팔게 했던 드가, 르누아르, 보티첼리 등 많은 작가의 대작을 포함한 가문의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고자 애썼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의 잃어버린 예술품 컬렉션을 찾으려는 아들 버나드에게 1950년대 유럽은 냉담했다. 처음에는 소장자들이 과거를 들먹이거나 그들의 소유권을 문제 삼는 시도를 막으려 했다.

“미술품 거래상들, 미술관 관장들, 갤러리 주인들, 경매회사들은 물론 부유한 소장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분개하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구이기에 갑자기 나타나서 귀중한 그림의 소유권을 주장하느냐’, ‘반세기 전에 이미 끝난 일이 아니냐’, ‘법에는 취득시효가 있지 않느냐’, ‘홀로코스트와 나치 약탈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예술 시장이 완전히 혼란해질 수 있지 않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예술계에 등장한 집단 양심’, 갑자기 나타난 드가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예술의 세계에서 회복 주장에 대한 호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술 세계에서도 옳은 일을 하자는 ‘집단 양심(collective conscience)’이 퍼져나갔다.

프리츠 구트만의 손자 시몬 굿맨은 “대개 아버지는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나는 몇 곳에서는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할아버지 컬렉션을 400여 점을 확인했고, 독일과 네덜란드로부터 절반가량 되찾았다. 특히 2002년 네덜란드 정부와의 화해 조정으로 많이 되찾았지만, 다수의 작품은 여전히 미술관과 개인 소장가들이 보관하고 있다. 또 일부 작품은 행방이 묘연하다.

시몬 굿맨은 1995년 10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발간한 1994년 전시회 카탈로그 사진의 작품 한 점이 가문의 것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에드가르 드가가 1890년에 그린 파스텔화 ‘굴뚝이 있는 풍경화(Paysage Avec Fum e de Chemin es)’로, 카탈로그에는 시카고 근처에 사는 제약업계의 억만장자 대니얼 설(Daniel C. Searle)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프리츠 구트만이 1931년 이 작품을 샀고, 1939년 안전하게 보관해달라며 예술품 관리회사인 파리에 있는 폴 그루프에시(Paul Graupe et Cie)에 보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1951년 스위스를 거쳐 뉴욕에 도착했고, 미국인 수집가 에밀 울프에게 팔렸다. 설은 자신이 종신회원으로 있는 시카고 미술관의 조언으로 1987년 울프에게서 수십만 달러에 사들였다.

작품 이력에 독일 화상인 한스 벤드란트(Hans Wendland, 1880~1965)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나치 강탈 예술품 회복 전문 변호사인 윌리 코트(Willi Korte)는 미국 방송 CBS와의 1997년 1월 16일자 인터뷰에서 “벤드란트는 프랑스에서 나치가 약탈한 예술품을 스위스로 밀수해 판매하는 데 누구보다 책임이 크다”라고 밝히고 있다. 설의 변호사는 1987년 구매 당시 벤드란트라는 인물이 잘 알려지지 않아 그의 행적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1317호 30면, 2023년 6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