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야기, 세상이야기 (4)

황만섭

30년종교전쟁이(1618~1648) 끝난 뒤 독일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 있었다. 국토는 전쟁의 상처로 잿더미만 남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남쪽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거창한 명함을 가진 오스트리아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헤름(1620~1688)이 정치력을 키우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는 베를린을 독일 수도로(1709)정하고 프로이센 왕국을 선포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손자 프리드리히 2세는(1712~1780) 계속해서 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경쟁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는 자기들의 왕권에까지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올까 걱정이 되어 동맹을 맺고 대응했지만, 프랑스의 혁명군에게 번번히 쫓겼다.

오스트리아는 다시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싸웠지만, 아우스데를리츠에서 항복을 선언하고, 844년 동안 이름만 거창하게 유지해왔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간판도 내려놓았다. 나폴레옹은 자기 친동생을 오스트리아의 왕에 앉혔다. 다시 프로이센이 러시아와 연합해 프랑스에 대들었지만, 이번에는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점령해버렸다(1806). 독일을 굴복시킨 나폴레옹은 라인 강 주변의 16개 주를 따로 떼어 ‘라인동맹’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훗날 독일이 강대국이 될 만한 싹을 잘라버렸다.

프로이센 왕들의 순서와 눈에 띄는 업적을 정리해 본다.

프리드리히 빌헬름(1620~1688) 북쪽 변방의 프러시아 왕, 세력을 키우면서 점점 남쪽으로 국토를 확장, 30년 종교전쟁을 직접 겪은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688~1740) 베를린을 수도로 정함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1744~1797) 강력한 왕권 확립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795~1861)아들이 없자, 동생(빌헬름 1세)에게 왕위를 물려줌

빌헬름 1세(1797~1888) 90세 사망, 1871년 프로이센을 ‘도이칠란트 제2제국’으로 바꿈, 비스마르크와 독일통일을 이루고, 처음으로 프랑스를 굴복시킴(60년만에 나폴레옹에게 패한 굴욕을 갚음), 종교전쟁(1618~1648) 때 빼앗긴 알자스 로렌지방을 되찾아 옴.

프리드리히 3세(1831~1888) 아버지 빌헬름 1세가 90세로 죽자, 27년간의 왕세자 생활 마치고 왕위에 올라 99일동안 통치하다가 후두암으로 사망. 왕세자 시절에 독일-프랑스 전쟁, 독일-오스트리아 전쟁, 독일-덴마크 전쟁 등을 승리로 이끈 장군.

빌헬름 2세(1859~1941)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 어머니 영국 공주(빅토리아

여왕 장녀), 네덜란드로 망명(독일 왕정 끝남)

외국의 역사를 단번에 이해하긴 어렵다. 왕들의 이름도 비슷비슷하고 거기에다가 왕들의 연대까지 한꺼번에 다 기억하기는 번거로운 일이다. 건물을 지을 때 뼈대를 세워놓고 디테일한 부분을 차차 채워 나가듯 역사도 큰 줄기만 잡아놓고 디테일한 부분을 반복해서 익혀가는 것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 뜻에서 역대 왕들의 순서와 중요한 업적을 간결하게 열거해 기억을 돕고자 했다.

나폴레옹은 1814년 연합군에 의해 이태리의 토스카나 앞바다에 있는 엘바섬으로 유배되어 섬의 대공으로 10개월 가까이 지내다가 영국군의 감시를 피해 섬을 탈출해 전광석화 같이 한 달 만에 파리에 입성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다시 군대를 모아 100일 동안 천하를 호령했지만, 다시 연합군에 제압당해 남태평양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늦게 통일을 한 이태리와 독일은 다른 나라들처럼 식민지를 가져볼까 하고 세계지도를 보았지만, 영국, 프랑스, 미국, 스페인, 네델란드 등이 다 차지해버린 후라서 가질만한 땅이 별로 없었다. 전쟁을 통해서라도 남의 땅을 빼앗을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1914년 6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세르비아를 방문했다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스트리아는 같은 독일어권의 나라이어서 이에 격분한 독일은 터키,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전쟁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크로아티아를 돕기 위해 러시아, 프랑스, 영국이 동맹을 맺고 끼어들었다. 그 싸움이 제1차 세계 대전이다. 독일은 1871년 프랑스를 굴복시킨 전쟁을 떠올리면서 프랑스를 우습게 보았지만, 그동안 은밀히 전쟁준비를 해온 프랑스는 이미 강한 나라가 되어 있었다. 러시아는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화해조약을 맺고 빠져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에 1.000만 명이 죽고 2.000만 명이 부상을 당한 처참한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미국은 뒷전에서 장사로 쏠쏠한 재미를 보면서 연합군에게만(영국, 프랑스) 전쟁물자를 공급했다. 독일은 “좋은 말로 할 때 중단하라”고 경고했지만, “민간인들이 하는 일이라서 모른다”며 오리발을 내밀자, 격분한 독일은 모든 미국 배들(군함, 상선, 어선)을 공격했고,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전쟁말미에 참가해 전쟁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 전에 2등국가였던 미국은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미 강대국이 되어있었다.

연합군은 독일에 배상금으로 1.320억마르크와 알자스-로렌지방을 프랑스에 귀속할 것, 아프리카에 가지고 있는 4개의 식민지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했다. 터키는 그리스, 레바논, 키프리스, 시리라아, 요르단 등의 식민지를 포기해야 했고, 오스트리아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의 식민지를 독립시켜주어야만 했다.

한때 유럽의 4분의 1를 차지한 오스트리아는 주먹 맞은 상투가 되었다. 독일은 생산시설의 파괴로 물건을 만들 수 없었고, 상이군인, 실업자, 거지들로 넘쳤다. 1920년 1월 1마르크 하던 감자 한 포대가 1922년 1월에 455마르크, 6개월 후 9천마르크, 한달 뒤엔 1억4천만 마르크, 다시 한달 뒤에는 자그만치 1천억 마르크(1923년 11월)까지 치솟았다.

이런 역경속애서 독일은 생산공장을 재건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긴축정책과, 고분고분한 국민성에 힘입어 다시 일상을 회복했다.

미국은 유럽전쟁 때 대량생산으로 호황을 누렸지만, 전쟁의 부족분을 다 채운 뒤에 나머지 물건들을 더 이상 팔 곳을 찾지 못해 쓰레기장에 쌓여갔고, 그 쓰레기장 밑에 미국이 묻혔다. 미국의 경제공항은 세계경제공항(1929)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수많은 실업자들과 거지들로 넘쳤고, 굶어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다. 유럽도 그랬다.

그때 우리는 일제에 의해 경술국치(한일합방)로 국권을 박탈당해 수탈과 핍박에 신음했다. 한일합방은 식민사관(內鮮一體, 내지(일본)와 조선은 한 몸)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말로 경술년(1910)에 당한 국가적 수치인 ‘경술국치’로 불러야 한다.

참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먼 나라 이웃나라, 교양

1210호 22면, 2021년 3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