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어느 해 여름

류 현옥

그 해 여름! 30여 년 전의 그 여름은 많은 다른 전후의 여름날들을 제키고 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다. 생전 처음 간 대도시 이스탄불의 일주일간이다. 뜨거운 햇볕아래 흐르는 보스포르스(Bosporus) 강물 위를 보트버스를 타고 동서 로 갈라져있는 도시를 건너다니며 보낸 짧은 휴가다.

내가 내과병동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외국인이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베를린 시 베딩 구역에 살면서도 곳곳에 늘어가는 캐밥 인비서와 터키채소 상점을 예사로 보며 관심을 가지지 않은 때다. 터키인들이 한때 유럽역사에 한몫을 한 콘스탄티노플의 자랑을 자존심으로 담아 가슴을 펴고 노동이민자들로 베를린에 제2 이스탄불을 이루어 살고 있다는 것도 모른 던 때다.

역사적인 터키나라에 대한 호기심으로 여행을 할 생각은 염두에 없었다. 같이 일하던 병동 의사 미샤엘이 세 아이가 딸린 가족을 데리고 이스탄불에 가서 2년간 살기위해 떠나는 것으로 나의 관심에 변화가 일어났다. 작별 파티 저녁 에는 미리연습을 했다는 각종 터키 음식에 터키음악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일 년 후에 미샤엘이 이스탄불에서 초대장을 보내왔다.

미샤엘 가족은 아시아 쪽 이스탄불에 오래된 집을 빌려 살고 있었다. 하루에도 시간제로 수돗물이 나오는가하면 새벽이면 미샤엘이 물통을 들고 근처의 물탱크에 가서 음료수를 사왔다. 나는 여름방학을 이스탄불에서 지내기 위해 나보다 먼저 손님으로 와있는 생면부지의 마르타와 일주일을 한방에서 지내면서 낯선 도시이스탄불을 뒤지고 다니게 되었다.

미샤엘은 터키의료 시설과 특히 터키음악을 연구하기위해 2년간 사는 동안 많은 베를린의 지인들을 초대했다. 그 전에는 중국 의학을 연구하며 침을 배웠고 “음식이 약”이라는 중국인들의 철학을 존경하며 한동안 손수 만든 중국요리로 친지들을 초대했다.

마르타는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으로 터어키에도 능통했다 . 특히 이스탄불은 해마다 두어 번씩 다녀가기에 구석구석을 잘 안다며 나를 그녀 손에 넘겼다. 일주일동안 따라다니며 구경을 하면 중요한 것은 다 보게 될 것이란다. 좀 섭섭하기는 했지만 무더운 여름 내내 이스탄불 여름대학에서 강의를 해야 하기에 시간이 없다고 하는 미샤엘을 오히려 위로해주었어야 했다.

마르타는 베를린에 서 왔다는 처음 보는 나를 끌어안고 인사를 했다. 저녁 상에 둘러앉자 다시 통성명을 밝히고 나이까지 공개하는데 마르타는 나보다 세 살이 어리고 베를린의 이름난 인문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마르타의 딸이 샬로텐 부르크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의 둘째딸 과 한반이라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보스포루스 강의 유일한 교통수단 보트버스를 타고 공주 (Prinzessin Insel )섬으로 가서 반나절을 지내면서 보스포루스 강에서 건져낸 생선 요리에 루콜라 살라드로 즐겼다. 다음날은 이스탄불의 명물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대성전을 방문하기 위해 시내로 나 갔다.

마르타는 스무 번은 더 들어가 본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혼자서 들어가서 보고 오란다. 두시간전에는 나올 수 없을 것이라며 여유 있게 보고 나오면 문 앞에서 기다리겠단다. 나는 그녀가 그 시간에 뭘 할 거냐고 물었다. 어디 카페에 들어가서 미루어둔 일기를 쓴다고 했다. 일기는 하루가 끝난 저녁시간 자기 전에 쓰는 게 아니냐고 내가 묻자 그렇지 않단다 . 그날 경험한 일 신문에 난 센세이션도 중요한 기록가치가 있는 사건이지만 마르타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기록한다고 했다.

어디에고 자리를 잡고 앉아 주위를 살피면 일어나는 뱃속의 느낌과 동시에 뒤따르는 사고를 기록하는 그녀 특수의 일기란다. 그녀에게는 이스탄불에서 새로운 것도 찾아 불수도 없고 감동받을 일도 없지만 그곳에 올 때마다 설명할 수 없이 일어나는 내적 감성을 기록해둔다는 것이다.

나도 오랫동안 일기를 썼지만 마음 상태를 서술하며 그날에 일어난 일로 대치 해본 적이 없었다. 길을 가다 낯선 사람에게서 뺨을 맞아 일어나는 내부 감정에 대해서는 쓸 수 있을지는 모른다. 앉은 장소의 분위기를 따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기록한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역사시간에 배운 콘스탄티노플에 기독교와 이슬람교 두 종교가 남긴 종교역사의 자취를 어마어마한 건물에 담은 “하기아 소피아” 성전은 그때까지 본 문화예술제 건물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상이 새겨진 천정은 금으로 장식되었고 그 아래 모자 익으로 새겨진 모하멧트 상이지난 1500년의 역사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었다.

성 전안의 순금장식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내 머리를 뜨겁게 하여 글로서 표현할 수도 없었기에 그때의 기록이 나의 일기장에는 남아있지 않다. 일기장에 써넣으려면 며칠이 필요할 것이었다.

마르타는 이미 스무 번을 이곳에 와서 카페에 앉아 터키 모키를 마시며 이스탄불이 풍기는 분위기를 일기장에 기록하기 위해 나를 혼자 궁전 속으로 밀어 넣은 셈이다. 낯설지도 않은 곳 인데 일어나는 무슨 새로운 감동을 속내부에서 끌어내어 표현을 하는 그녀가 부러웠다.

며칠간을 대도시 이스탄불을 마르타의 설명을 들으며 산책했다. 이 여행은 내가 터키 이웃 시림들에 호감을 갖게 된 동기가 되었다.

마르타는 훈련된 전형적인 교육자의 조리 있는 말로 유럽역사속의 터키 역할을 설명을 했고 흔적으로 연결되는 중요한곳은 빼놓지 않았다. 비가 오면 물속으로 잠긴다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몇 백 년이 넘은 유명한 구 이스탄불 다리를 몇 번이나 오가며 감탄의 시간을 가졌다.

마르 타는 근처의역사도시를 순례하기위해 떠났고 나는 미샤일 가족과 함께 짧은 여행을 하기로 했다. 미리 예약을 한 비싼 여행을 지금은 기억할 수 없는 연유로 실행하지 못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베를린에서 만나자며 헤어진 마르타와는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것도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할 수 없다.

어느 날 미샤엘로부터 마르타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받았다. 나는 그녀를 잊은 채 살았지만 미샤엘은 초대한 손님인 나를 마르타 손에 넘겨준 미안함으로 나와 그녀의 인연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건강한 체질이었고 열린 세계관의 소유자였다. 세상에 대한 건전한 호기심을 가진 문학을 사랑하는 여인 이었다. 그런가하면 휴머니즘의 고등교육을 받은 인간애를 소유한 독일 교육공무원이었다.

30년 전 내가 그녀를 이스탄불에서 만났을 때 이미 남편과 이혼한지 몇 년이 되었다고 했다 하나뿐인 딸과 베를린 스테글리치 구에서 살고 있었다. 화가인 전남편은 남독의 작은 동네 호숫가에 오래된 농가를 사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다고 했다.

일 년에 두 번씩 딸을 위해 전남편을 방문하여 시골생활을 즐긴다고 했다. 농가의 뒷문을 나서면 바로 호수로 연결되는 오솔길이 나왔다. 아침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큰 타월을 걸치고 몇 발자국 걸어 호수에 나가 나체로 물속에 뛰어 들어갔다. 젖은 몸을 타월로 감싸고 집으로 돌아와 아침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이혼한 남편과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전남편은 그동안 여러 번 애인을 바꾸었지만 마르타가 정년퇴직을 하고 베를린에서 그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마르타 자신은 유부남 동료와 정신건강을 위한 정사를 즐기며 베를린에서 자유분방하게 살고 있었다.

결혼시절 초기에는 남편이 생활능력이 없었기에 그녀의 월급으로 살았고 이혼 후에도 종종 화가의 가난을 해결 해주어야 하는 처지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때 나는 그녀의 말에 감동하여 호의를 보였다. 화가는 농가를 딸 앞으로 이전을 했고 딸은 어머니가 남길 유산을 지금 필요한 아버지 생활비로 투자하는 것을 허락 했단다. 마르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다음날 미샤일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기위해 전화를 했다 .

마르타는 정년퇴직을 하는 해 전남편이 사는 곳으로 이주를 했다. 서로의 성적 자유를 인정하고 예의를 갖추어 서로 존경한다는 약속과 함께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 호수로 향한 창문이 달린 뒷방 에 입주를 해서 산지도 몇 년이 되었다.

마르타는 하루에 두 번씩 일기를 쓰는 것을 실천하며 대자연속으로 흡수되어갔다. 낚시꾼들로 부터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사서 생선요리를 하고 집 앞의 텃밭에서 자라는 온갖 채소로 살 라드를 만들어 전남편과 얼굴을 맞대는 시간을 가졌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양조장을 하는 화가의 친구를 생선 요리에 자주 초대했고 대가로 친구는 일 년 내내 필요한 양의 포도주를 제공했다. 마르타 역시 식사 때면 순한 시골 적포도주를 즐겼다. 호수면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물의 온도가 18도가 되기를 기다려 나체로 뛰어들었다. 호수래야 40분이면 걸어서 한 바퀴 돌 수 있었고 반대쪽 호반의 바위에 앉아 낚시대를 들고 앉아 소일하는 이웃노인과도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노인 역시 나체로 물에 뛰어드는 대도시에서 온 신식 여자에 적응을 했고 언제부턴가 잡은 생선을 들고 방문을 오기 시작했다.

노인 역시 퇴직 교사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대화를 즐겼다. 이웃 간의 친교가 두터워 지자 마르타는 생선을 들고 온 노인을 그녀의 방으로 초대했다. 읽고 싶은 책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 읽은 책을 가져와서 새로 고른 책을 뒤적거리며 나가다가 화가의 초대로 정원의 상에 앉아 허브차를 마시며 이웃 사이를 돈독히 했다.

마르타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새 날을 의식하기도전에 세상을 떠나는 날 아침이다. 아직 날씨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4월 초 노인이 늦장을 부리다가 예외로 좀 늦은 시간에 낚싯대를 들고 자리를 잡았다.

습관적으로 건너 쪽 호반에 자리한 농가 쪽을 바라보았다 나체로 물에 뛰어들기에는 수온이 낮다는 생각을 하는데 물위에 떠있는 인체를 발견했다. 눈을 감았다가 눈을 더 크게 뜨고 다시 쳐다보니 움직이지 않고 떠있는 몸이 마르타 라는 것을 직감했다. 핸디로 전화를 했다. 뛰어 가기에는 먼 거리 이었다.

화가가 놀란 목소리로 받았고 모닝드레스를 걸치며 핸디를 귀에 대고 호수가로 뛰어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노인은 응급차를 불렀다. 앰뷸런스 헬리콥터의 소리가 들리고 사이렌을 울리며 가까운 도시에서 앰뷸런스차가 도착했다.

물에서 건져내어온 마르타를 인공호흡으로 시도했지만 재생은 이미 불가능했다. 베를린에서 소식을 들고 온 딸이 이럴 수가 없다며 사인을 알기 위해 부검신청을 하였다. 마르타는 심장마비로 지척에 보이는 집을 향해 허우적거리다 혼자 숨을 거둔 것이다.

어머니가 자고 일어난 침대에 앉아 오열하는 딸을 위로하기 위해 들어오는 아버지를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딸은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이곳에 오게 해놓고 보호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화가는 그 방 구조를 모른 체 살았다. 정말 한집에 살면서 너무나 무관심했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의식했다.

마르타가 일어나 큰 타월로 온몸을 감싸고 앉았던 책상 위에 열린 채 놓인 그녀의 일기장이 화가의 눈에 들어왔다 . 어느 해 화가가 생일 선물로 준 그녀가 사랑한 파카 만년필이 일기장 갈피에 끼어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곧 책상 앞에 앉아 쓴 그날의 기록을 여러 번 읽으며 화가는 울었다.

“ … 이유 없이 몸이 무겁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한 때문인가? 왜 이렇게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알 수 없다. 호수 물에 몸을 적시고 나오면 심신이 가벼워 질 테지.? 그런데 왜 이렇게 망설이게 되는가? 그런대로 잠을 잔 것 같은데 …그래도 수영을 하지 않으면 나의 하루는 시작되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 하루가 내 옆으로 지나가기게 방치 할 수야 없지! 온몸이 으스스 한 것을 보면 아직도 기온이 낮은 모양이지! 왜 자꾸 금방 나온 침대와 이불이 쳐다보이는가? 다시 따뜻한 이불속으로 들어가 5분쯤 꾸물거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 일어서서 집 뒷문으로 나가기만하면 호수는 나를 물속으로 끌어들일 것을 나는 안다 . “

심장마비가 사인으로 판정되자 화가는 마르타가 다시 침대 속 이불 속으로 들어가 5분간 눈을 감았다면. 5분후에 몸속에서 보내는 신호로 수영을 포기했다면. 수영하기에는 아직 도 찬 호수 물속으로 뛰어들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면. 물속에서 심장마비는 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어머니를 아는 딸은 잠자리에서 일어난 어머니는 다가온 죽음을 예감했을 것이란다. 그러면서도 내키지 않는 뭔가를 느꼈다하여 다시 이불 밑으로 들어갈 어머니가 아니었다고 했다. 마르타의 딸이 말한 죽음의 예감은 그 이전에 경험하지 않은 생소한 것이었다. 그 순간까지 경험하지 않았던 느낌을 다가오는 죽음으로 예감 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피할 수가 없었을까?

죽음이 기다리는 호수로 나가기 전에 몸속에서 보내는 신호를 그녀는 느껴 의식하고 일기장 위에 글로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몸속의 신호를 무시한 체 찬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현상은 흔히말하는 “습관은 하늘의 힘”인지도 모른다.

죽음은 갑자기 찾아온다지만 이렇게 미리 신호를 보내는지도 모른다. 연습을 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첫 죽음으로 죽는다.

습관의 강요에 순종하며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ㅡ 인생 의 마지막이 될지 알지 못한 체 새 하루를 출발하는 행위로 그녀는 나체로 태고의 대자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사랑한 고목과 밤새 정결해진 호수 물 은 묵묵히 받아들였다 . 신은 5분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마르타는 세상을 떠났다.

마르타는 내 기억 속에 살아남아 있다. 그 여름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강의 나룻배를 타고 아시아쪽 이스탄불과 유럽 이스탄불을 같이 즐긴 한 여름날의 추억 속에 남아 나에게 경고할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오 분 간만이라고 내속으로 들어가서 마음속과 머릿속을 점검하고 재결정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라 !” 고. 유독 죽음의 신호가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몸속 깊은 곳에서 보내는 경고를 예감 하면 잠시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는 자세를 키워 보라고.

마르타는 하루도 빼지지 않고 마음속의 변화를 예민하게 시계하고 기록을 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적용하지 못했다. 강한 습관의 세력에 순종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시작되는 하루를 손으로 주물러 나에게 맞게 만들고 내 마음에 들게 하여 특히 하루가 끝나 잠자리에 들 때면 만족할 수 있는 하루를 지냈다고 할 수 없는 운명을 산다. 이 5분간의 여유로 하루의 순간들에게 무게를 주무로서 인생의 가치가 더해지지 않을까? .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는 하루의 시간을 잠간 붙들고 그 시간을 채울 일에 대한 재검의중요성!

나는 마르타의 묘지 앞에 놓을 편지를 썼다. 마르타와의 인연은 이스탄불의 그 화려한 여름을 퇴색 되지 않게 하여 해마다 여름이면 나를 그해 여름 속으로 데려갈 것이다.

1253호 14면, 2022년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