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섭의 미국이야기 (10)

황만섭

영국과 프랑스는 지금의 미국땅이 있다는 걸 모르고 수십 년 동안 카나다 동토만 돌았다. 그 사이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재빠르게 남아메리카 땅을 나누어가졌고, 스페인은 서서히 베네수엘라와 멕시코를 거쳐 그랜드 케니언의 콜로라도 강 근처까지 위쪽으로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올라왔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중에야 지금의 미국땅 위치를 알아차리고 급히 뛰어들었지만, 나폴레옹은 유럽의 패권에 몰두하다가 새로운 이 땅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어 루이지애나(우리나라 10배 크기) 땅을 돈 몇 푼 받고 미국에 팔아 넘겼다. 버지니아에서 시작한 미국은 오하이오 평원을 거쳐 미시시피강을 건넜고, 계속해서 루이지에나 땅을 사들인 다음, 태평양이 나올 때까지 국토를 넓혀갔다. 그 뒤에 택사스 합병과 멕시코할양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땅을 매입했다. 거기엔 강압도 내재해 있었다. 1868년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였고, 1959년에는 군대를 앞세워 하와이를 식민지로 만들어 50번째의 미국 주에 끼워 넣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으로 시작한 ‘뉴암스텔담’은 숫자가 많았던 영국출신들이 뉴욕으로 고쳐 부르면서 오늘날의 뉴욕으로 불리게 된다.

1812년 시작한 영국과의 전쟁을 마치고,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스 대령과 클라크 중령을 시켜 미시시피강 너머에 있는 땅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했다. 이 두 사람은 27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태평양이 나올 때까지 모든 지역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 조사를 기본으로 하여 미국의 서부진출이 시작되었다. 1820년부터 시작한 이 서부진출은 전쟁을 통해서 1840년경엔 오리건, 캘리포니아, 텍사스, 플로리다 등의 땅을 확보했다.

1790년에 400만 명이던 미국의 인구가 1850년에는 230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기름진 새 땅에서는 수확이 풍성했고, 한 사람이 하루 종일 일해야 500g의 목화씨를 고르던 일을, 휘트니의 기계발명으로 50배가 더 빠르게 목화씨를 빼냈다. 1831년 버지니아의 한 농부가 발명한 곡물수확기는 예전보다 10배가 더 빠르게 수확하는 등 미국은 정신없이 발달하고 있었다. 북부에서는 도로와 운하건설을 통해 공업과 섬유산업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운반했으며, 남부의 담배재배는 번창했고, 특히 면화사업은 영국에서 없어서 못 파는 호황을 누렸다. 이제 농장에서는 더 많은 노예가 필요했다. 70만이던 노예는 갑자기400만 명으로 늘어났다.

남부귀족들은 노예제도를 주장했고. 공업과 상업이 주종을 이루던 북부는 노예제도폐지를 주장했다.

뉴욕의 허드슨강과 에리호수를 잇는 580km의 운하가 1825년에 완공되었고, 1850년에 14,400km이던 철로가 1860년에는 36,000km로 늘어났다. 그런 와중에서도 남부와 북부의 이해관계는 갈수록 충돌이 겹치면서 악화되고 있었다. 당시 22개 주는 11개 주로 각각 노예제도 문제에 찬, 반으로 갈라져 그런대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1819년 새로 미국의 영토가 된 미주리주가 친 노예주의로 연방가입을 신청하면서 그 균형이 깨지고 말았다.

노예제도는 의견을 달리하는 주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판도가 달라지는 골치덩어리가 되었다. 노예제도폐지는 남부경제를 파탄시킬 정도로 의존도가 높았다. 한 사람당 300달러 하던 노예가격은 1850년에는 2000달러로 뛰었다. 노예상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마구잡이로 흑인들을 잡아다 팔고 있었고, 북부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1810년경에 남부에서는 200만 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북부의 섬유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겨우 1만여 명 정도였다. 이제 반대로 섬유산업이 번창하게 되어 생산하는 제품양도, 일하는 인력의 숫자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로버트 풀턴이 개발한 증기선으로 운하를 통해 운송되었고, 100달러이던 운송료가 15달러로 떨어졌다. 또 한편으로는 새로 생긴 대륙횡단 철도를 이용해 싸고 편한 운송이 활발했다. 1848년에는 캘리포니아 시에라네바다 산맥에서 금이 발견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빨리 와야 한다”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한편 남부의원 브룩스가 북부의원 섬너를 지팡이로 두들겨 패 평생불구자로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동안 쌓인 지역감정과 경제적 이익, 서로간의 문화적 차이가 미국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폭력과 테러를 서슴지 않는 과격분자가 늘어나고, 남부노예탈출을 돕는 폭력조직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존 브라운이라는 자는 자기 아들과 흑인들로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총격전을 벌이면서, 흑인공화국을 세워야 한다고 선동했다. 그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백인이었다. 남부사람들은 그를 ‘공포의 살인마’라고 불렀고, 북부사람들은 그를 정의의 용사이며 신의 아들이라고 칭송했다. 1859년 12월, 그는 교수형을 당했다. 한편 ’헤리엣 스토’라는 여성이 <톰 아저씨의 오두막 집>이라는 책을 펴내(1853), 비참한 흑인노예의 삶을 그려 북부사람들을 울게 만들었으며, 반(反)노예운동에 불을 당겼다. 그녀는 책에서 나오는 인세전부를 노예제도철폐운동에 기부했으며,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831년에 버지니아에서 70여명의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백인 50여명이 살해되었다. 다른 흑인들도 동조해 폭동이 크게 확산되길 내심 바랐지만, 폭동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고, 주모자 ‘내트 터너’는 교수형을 받았으며, 그 보복으로 흑인 1000여명이 죽임을 당했다.

스티븐 더글러스와 에이브러헴 링컨은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나란히 출마하여 공개토론을 벌였다. 이 선거에서 링컨은 비록 낙선했지만, 토론을 통해 사람들은 시골출신변호사 링컨의 탁월한 식견에 놀랐다. 두 사람은 16대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맞붙었고, 대통령선거 토론회에서 링컨은 “노예제도폐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의 중요한 신념은 연방의 분열을 막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검둥이들을 유권자나 배심원관리로 만들거나 백인과의 결혼에 찬성한 적이 없다” 그리고 또 그는 “연방을 지키기 위해서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것도, 그것을 폐지하는 것 어느 것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가 한 이 말은 족쇄가 되어 두고두고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만약 그의 말대로 연방이 분열되었더라면, 오늘의 미국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1860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남부는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링컨이 1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말았다.

이제 남부는 연방을 탈퇴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일먼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가 탈퇴를 선언했고, 그 뒤를 이어 미시시피, 루이지에나, 앨라배마, 조지아, 플로리다, 텍사스가 차례를 이었다. 탈퇴한 7개 주가 모여 제퍼슨 데이비스를 새 대통령으로 뽑은 후 연방탈퇴를 선언했다. 84년 만에 연방은 깨어졌고, 이제 연방을 유지하는 방법은 전쟁을 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참조 : 먼 나라 이웃나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참조

2019년 8월 23일, 1136호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