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39)
독일의 정당(9) – 동맹 90/녹색당 ①

독일은 ‘정당국가’라고 칭해질 정도로 정당의 법적·정치적 위상이 높은 국가이다. 이러한 정당의 높은 위상은 독일 민주주의와 나치즘의 역사, 그리고 선거와 국가체제 등 제도적 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낳은 결과이다. 세계에서 정당정치의 모범으로 칭송받는 독일정당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먼저 독일 기본법상의 정당과 정당의 역사를 살펴보았고, 연방의회에 진출한 각 정당을 창당 순서로 살펴본다.

동맹 90/녹색당(Büdnis 90/Die Grünen)

녹색당(Die Grünen)은 환경, 여성, 반핵, 평화 등 다양한 신사회운동 세력을 기반으로 1980년 창당되었다. 녹색당은 ‘반정당 정당’을 기치로 내거는 등 기성 정치에 대한 도전으로 젊은 세대의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하였고 약 8% 전후의 지지도를 유지해왔다.

최근에는 그 지지도가 계속 상승중이며, 3월 14일 치러진 바덴뷔텐베르크 주의회 선거에서는 32.6%를 득표 제 1당이 되었으며, 같은 날 치러진 라인라트필즈 주의회 선거에서도 9,3%를 득표하여 주정부 연정에 참여가 예상되고 있다.

녹색당은 좌우를 망라하는 광범위한 이념적 노선을 포괄하며 창당되었으나 창당 이후 다양한 노선 간의 내적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이 갈등은 근본주의자와 현실주의자 간의 유명한 논쟁으로 표출되었다.

녹색당은 ‘토대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당정분리원칙, 순환원칙, 정당기율원칙, 보수제한원칙 등 다수의 급진적 정당민주주의 실험을 실천에 옮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 내부의 저항과 민주주의 담론의 변화 속에서 급진적 직접민주주의 개념은 그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기존 의회정치와 정당정치에의 적극적 적응과 수용이 우선시되었다.

녹색당은 통독 이후 동독 시민운동세력과 녹색당과의 통합을 통하여 동맹 90/녹색당을 구성하였으며 1998년에는 사민당과의 적록연정에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집권세력의 일부로 정착하였다.

녹색당은 환경세 도입, 시민권법 개정, 재생가능에너지법 도입 등을 주도하면서 유럽의 환경운동 성장 및 녹색 당 세력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녹색당 탄생 배경과 창당

탄생배경

1975년 독일의 환경수도라고 우리에게 알려진 프라이부르그 옆 빌(Wyhl) 지역에 핵발전소(원전)를 짓는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독일의 시민사회 운동은 “반핵”의 깃발로 뭉쳤다. 1976년 브록도로프, 1977년 칼카르 원전 반대투쟁은 68때와 비슷한 정도로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더불어 “운동”만이 아니라 정치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었다. “68혁명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루디 두취케(Rudi Duchke)가 “제도권을 향한 대장정”을 주장하며 기존 정당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당의 건설을 주창하였다.

1970년대 독일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전기와 에너지 수요가 크게 늘면서 정부는 원전 건설을 에너지 정책의 핵심으로 삼았다. 환경연합을 중심으로 한 환경운동은 반핵운동에 주요역량을 쏟아 부었다. 이 반핵운동에 젊은이들이 적극 참여하기 시작한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비일 원전 투쟁은 이후 북서부 노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칼카르원전 반대투쟁으로 이어진다. 칼카르 투쟁에는 이웃의 네덜란드, 벨기에 환경단체들도 함께 한다.

녹색당의 출현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유럽공동체의 유럽의회 선거였다. 공동체는 이후 유럽 의회 구성을 위해 각국이 직접 선거를 하겠다고 밝혔다. 각국의 다양한 정당들은 서로 이념이 비슷한 정당끼리 국경을 넘어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사민당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환경, 시민단체들은 사민당에 대한 비판적지지 혹은 독자 선거운동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을 하게 된다. 1978년 환경연합 전국대회는 이 두가지 노선이 충돌하는 자리였다. 결국 의회에 운동의 거점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운동과 의회활동이라는 두 날개가 필요성이라는 절충점을 찾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또다른 정치연합(SPV)”였다. 독일 녹색당의 전신이고 환경운동과 평화운동 진영의 주류는 이 단체를 통해 유럽의회 선거에 뛰어들었다. 1979년 여름 유럽의회 선거에서 “또다른정치연합”은 3.2%라는 상당한 득표율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의회 진출은 실패하였지만 녹색당 창당의 큰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1980년 독일 헌법재판소가 있는 칼스루에라는 작은 국경도시에서 녹색당이 창립된다.

녹색당 창당

1980년 1월 13일. 히피,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페미니스트, 예술가, 반전활동가, 보수적 지역주의자들이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는 카를스루에 시민회관에 모였다. 언뜻 보기에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였으나 이들이 공유한 것은 ‘환경’이었다. 이날 격렬한 논쟁을 거친 뒤 연방 녹색당을 창당했다.

“반정당 정당” 기치를 내걸고 기존 정당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운동인 독일 ‘68운동’ 주역들이 이끈 녹색당은 급진적이고 파격적이었다. 권위주의적 가치에 대항해 새로운 정치 문화를 일으켰다. 창립 당시 녹색당은 “새 고속도로 건설을 중단하라”거나 “귀중한 식수를 변기 내리는 물이나 세차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1983년에 연방의회 진입에 필요한 최소 득표율(5%) 이상을 얻어 연방의회에 입성했을 때 녹색당 의원들이 평상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나타난 건 유명한 일화다.

창당 당시 녹색당은 “기존 정당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라는 뜻으로 ‘반정당 정당(Anti-Parteien-Partei)’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당내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실험들을 전개하였다.

고위당직자들의 관료주의를 방지하기 위해 그 자리를 명예직으로 한다든가, 위원회를 포함한 모든 자리에 대표나 위원장을 대신하여 대변인만을 두는 체제, 의회의 임기를 둘로 쪼개어 의원들을 교체하는 의원 순환제, 당직과 선출직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겸직금지제 등이 그것이었다.


교포신문사는 독자들의 독일이해를 돕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교육 등에 관해 ‘독일을 이해하자’라는 연재란을 신설하였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편집자주

1211호 29면, 2021년 3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