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왕국 독일에는 제품·인프라·시스템뿐만 아니라 인물에도 명품이 많다.
경제적으로 ‘라인강의 기적’과 정치적으로 ‘베를린의 기적’을 이끌어온 ‘서독과 통일독일의 연방총리들’이야 말로 나치 정권의 혹독한 시련을 겪은 독일이 길러낸 최고 명장들이며 독일 국민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품이다.
독일의 연방총리를 보면 자유민주주의와 강력한 서독(아데나워)- 시장경제와 경제기적(에르하르트)- 동방정책(빌리 브란트)-동서 데탕트 시대(슈미트)- 유럽 통합과 독일 통일(헬무트 콜)- 노동개혁과 독일병 처방(슈뢰더)- 독일병 치유와 EU 대주주(메르켈) 그리고 현재 올라프 숄츠로 이어지며, 제2차 세계대전 후 건국-분단-냉전-성장-통일-통합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잘 짜여진 시나리오로 구성되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명품, 독일 총리들(8)
시대적 흐름을 선도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➂
동방정책 ‘나침반’ 들고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로 독일을 이끌다
브란트는 총리 취임 직후부터 공약대로 사회복지제도를 대폭 확대했다. 사회부조 제도, 의료보험의 보장 범위와 대상, 실업급여와 퇴직자 연금도 강화했다. 주택 정책에서 임차인의 권리를 강화하거나 주거 관련 지원금을 늘리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특히 브란트 집권 이후 사민당 정권은 독일의 교육 제도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이원적인 교육 체계 및 대학 평준화를 전면적으로 도입 실시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를 위해 교육예산을 160억 마르크 정도에서 500억 마르크까지 확대하여 초·중등교육 및 직업교육 학교를 증설, 보수하고, 교사의 질을 강화하는 등 교육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강화했다. 또 대학 정원을 크게 늘리고 대학 입학을 위한 입시 문턱을 대폭 완화하였다.
실제로 브란트의 취임을 전후해 대학생 수는 100,000명 수준에서 650,000명으로 대폭 증가했다.
외교적으로는 콘라트 아데나워 이래로 독일 정부가 고수하던 “동독과 수교를 맺은 국가와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적극적으로 공산권과의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동방정책’을 표방하였다.
이는 때마침 미국 공화당 출신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데탕트(냉전 긴장 완화) 정책을 추구하던 것과 맞아떨어지며 힘을 얻었다. 이로 인해 소련 및 동구권 공산권 국가와 교류를 확대하며 긴장관계를 완화하였다.
이처럼 당시 브란트는 외교, 국제 협력 및 대화를 강력히 옹호했다. 이런 브란트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던 정치인이 바로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전 수상이었다.
이 두 사람은 국제 무대에서 평화, 군축, 그리고 사회 정의를 적극적으로 촉진하며 비슷한 가치와 목표를 공유했다. 더불어 이들은 외교 정책에서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된 세계 질서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을 강조하며 세계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두 지도자는 특히 개발도상국들과의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발 원조, 부채 탕감, 공정 무역의 확대 등을 옹호했다. 특히 팔메는 이 분야에서 매우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했고, 강대국에 의한 개도국의 경제적 착취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스웨덴에서 망명생활을 해왔던 브란트는 스웨덴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고, 독일인 어머니를 둔 팔메는 독일어에 매우 유창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기욤 간첩 사건과 총리직 사임
1차 오일 쇼크의 충격이 여전하던 1974년 브란트의 비서 귄터 기욤과 그의 부인 크리스텔 기욤이 동독의 간첩이었던 사실이 드러나 많은 독일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겼다. 브란트 본인도 동독의 간첩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브란트는 이를 강하게 부인했으며, 브란트가 이에 관여했다는 증거나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조사 결과 귄터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들 중에 국가 안보에 심각하게 위해가 될만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다. 기욤은 브란트의 개인 비서였지만 공적인 직책을 맡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브란트의 소속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은 브란트의 실추된 이미지로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브란트를 내치고 재무장관인 헬무트 슈미트를 차기 총리로 내세우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하고, 브란트에게 사임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이를 버텨내지 못한 브란트는 취임 4년여 만에 총리직을 사임했다. 브란트는 기욤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한 우울증으로 총리직을 수행하기 어려워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1974년 총리직 사퇴는 그에게 세계를 겨냥한 새로운 경력의 시작이었다. 그는 총리직을 그만둔 후에도, 오랜 기간 ‘사회주의 인터네셔널’의 수장으로, 또 제1, 제3세계를 아우루는 ‘남북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세계평화와 국제개발에 크게 공헌했다. 남북위원회는 1980년 ‘브란트 보고서’를 발간하여, 세계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여기서 전문가들은 발전도상국가들의 가장 절박한 문제인, 식량, 기후문제 및 자원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제안들을 제시하고, 새롭고 보다 공정한 세계경제 질서를 요구했다. 세계시민 브란트의 이름은 세계의 어떤 무대에서도 늘 존경과 신뢰의 징표였다.
브란트는 늘 “좋은 독일인이 되고자 한다면, 우선 좋은 유럽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가 평생 갈구했던 독일통일도 유럽과 세계평화의 큰 틀 속에서 이루어야 할 꿈이었다.
브란트가 총리로 재직한 5년 간의 시간은, 콜과 메르켈의 16년, 그리고 아데나워의 14년에 비하면 크게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 중 그는 독일인에게 예언자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했다. 만인에게 ‘황야로부터 벗어나는 길’(키신저)을 설파하고, 앞장서서 동방정책의 주된 경로를 탐색하며 그 길을 반듯하게 닦았다.
빌리 브란트는 1992년 10월 8일, 라인강변의 운켈 자택에서 지병인 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78세.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베를린에 안장되었다.
1317호 29면, 2023년 6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