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광부의 근무조건과 생활 환경(1)
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의 ‘뒤셀도르프 공항’. 에어 프랑스 제트기 한 대가 도착했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검은 머리의 한국인, 바로 파독광부 1차1진이었다. 1차1진은 모두 123명. 그리고 5일 12월 27일, 1차1진 나머지인 124명이 독일에 도착했다. 이렇게 1차 1진 247명을 시작으로 파독 근로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교포신문사에서는 파독 광부 60주년을 맞아, 1월부터 매월 4 째주 “파독광부 60년” 특집을 이들이 도착한 12월 22일까지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독자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발전된 독일의 채광기술을 배워 한국광산의 발전을 도모한다며, 1963년 한국정부와 서독정부는 ‘한국광부의 직업연수’를 위한 서독파견 프로그램에 합의하였다. 한국광부의 독일 파견은 ‘독일광산에서 한국 광산근로자 임시 고용협정’에 따라 이루어졌는데, 3년간 독일의 발전된 석탄 채광기술을 배운다는 명분으로 독일의 탄광에 배치되어 단 2-3개월의 간단한 교육을 마치고 소위 지하의 막장까지 들어가 실제로 석탄을 캤다. 이는 교육과정이 아니라 정식 노동이었다.
산업연수생의 신분으로 3년 기한으로 노동하는 것을 제외하면, 파독 광부들의 제도상의 조건은 독일인 광부들과 특별한 차별은 없었다. 노동조합도 가입하였으며, 의료보험 등 각종보험의 가입과 사회보장의 혜택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3년이란 기한이 만료되면 계약연장이 잘되지 않고 귀국해야 하는 것과 또 계약기간 내에 해고되면 체류허가도 취소된다는데 있었다. 이것은 기본권을 제한한 인권침해였지만, 연수계약이라는 명분으로 숨겨졌으며 해고에 따른 실업수당의 수령은 차치하고 강제출국 등의 불이익을 받아야 되었고, 사망과 부상의 경우 보상문제도 불안정하기만 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갖는 기본적 권리가 제한된 고용불안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부당해고에 대한 소속노조의 구조노력, 노동법원에 제소 등 형식적으로는 독일인과 똑 같은 권리도 있었지만, 언어의 어려움, 독일제도를 잘 모르는 것, 문화의 차이, 외국에 대한 조심성 등으로 인한 실질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질병 시 병가에서도 담당자들의 차별적인 재검요구 등도 있었고, 안전사고 등에서 노조들의 소극적인 태도 등도 불이익의 하나였다.
파독 광부들의 거주조건은 매우 열악했다. 일반적으로 2명이 한 방을 사용하였는데 4명이 좁은 방을 같이 쓰는 경우도 있었다. 광산에서 제공하는 기숙사는 매우 낡았으며 편의시설도 좋다고 볼 수가 없었다.
또한 한국정부의 자국노동자의 노동조건에 대한 개선의 노력은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파독 광부들은 전하고 있다. 실제로 1963년, 1970년, 1971년 등 계약조건의 개정협정에서 한국정부는 독일 측 제안을 전적으로 수용하였고 단 한 건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각 광산에서 독일 측 사용자의 부당행위를 조사하거나 감시하는 일은 없었고, 반대로 우리 노동자들의 노동쟁의 등에 대한 감시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파독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여야 할 가장 가까운 사람은 통역들이었다. 파독광부들의 입이 되어 불편과 요구사항을 정확히 전달하고 그것이 개선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 통역의 임무였다. 그러나 3년이라는 정해진 기간을 일하고 돌아가야 하는 파독광부들보다는 광산경영층이나 한국 대사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우가 가끔씩 생겨 파독광부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파독광부들의 작업현장에 관한 증언들
1964년 5월11일 월요일 오전 5시30분, 독일 노드라인-베스트팔렌주 카스트롭-라욱셀(Castrop-Rauxel) 광산 탈의실. 많은 노동자들이 4~5미터 높이의 공중에 매달려 있는 작업복을 내린 뒤 부지런하게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검은 머리의 아시아인들도 보였다. 한국인 파독광부 1차 1진이었다. 얼굴에는 약간의 긴장과 설레임, 그리고 두려움도 엿보였다. 이날은 한국인 파독 광부 1차1진이 정식 입갱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쏟아지는 탄 무더기에서 목숨을 구해줄 안전모(지켜어하이트)와 안전신발(슈헤), 어둠 속에서 길을 밝혀주는 전등(람페), 가죽으로 제작된 특수 장갑, 가스 유출에 대비한 가스마스크, 낮은 탄층을 기어다닐 때 몸을 보호해주는 무릎받침과 앞정강이 보호대, 내리막길 엉덩이 보호대….’지하 전쟁’을 위한 장비였다. 한국인 60여명도 새벽 4시부터 준비한 식사꾸러미와 4~6리터 안팎의 물과 함께 작업복을 입고 이 같은 ‘전쟁 장비’를 챙겼다. 떨리는 마음으로 ‘마켙누머’가 박힌 출근표를 찍었다. 이틀 전에 갱내를 둘러보긴 했지만, 그것은 견학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 날이 공식적인 첫 지하 작업일인 셈이었다.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 샤크트의 대형 승강기 앞에 섰다. 보통 3층으로 돼 있는 이 승강기는 층마다 12~15명을 태웠다. 담당 직원은 탑승 인원을 철저히 제한했다. 안전사고를 우려해서다. 아래로 내려간다는 신호를 보낸 뒤 아래에서 응답이 있은 뒤에야 승강기를 운행했다. ‘어이, 김형. 그뤽아우프(행운이 있기를)!’이형도 그뤽아우프!’ 승강기가 지하를 향해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폭발적인 속도였다. 비행기가 급하게 내려갈 때 느끼는 것처럼 귀가 막막해 왔다. 불과 2, 3분 만에 지하 700미터의 막장에 도착했다.
드디어 문이 열렸고, 지하 세계도 함께 열렸다. 희미한 백열등 불빛으로 지하 세계는 짙은 안개가 끼인 듯한 분위기였다. 한국인 광부들이 3년간 청춘을 불살라야 할 지하 채탄장. 지하 굴속은 살아 꿈틀거리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들에게 땀과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리고 ‘신화’를 안기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한용, 「호평받는 한국광부들」, 『사상계 1964년 10월호』, 204205쪽).
우리는 매일 목숨을 건 전투를 했다” 갱내 열악한 환경도 파독 광부들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찌는 듯한 더위와 석탄가루와 돌가루 등 분진은 파독 광부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소였다. 더위는 살인적이었다. 지하 700~1200미터에 있는 독일 광산의 막장 온도는 섭씨 25~40도 사이다. 보통 30도는 쉽게 넘는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나오는 이곳에서 안전을 위해 ‘중무장’을 한 채 80개의 쇠동발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권씨 등은 속옷만 입거나 아예 윗옷을 다 벗고 일하는 게 다반사였다.
땀에 젖은 팬티를 하루 다섯 번 이상을 짜서 입어야 했고, 장화는 땀으로 젖어 열 번 이상 쏟아내야 했다고 한다. 김태원의 얘기다. 팬티를 작업장에서 다섯 번 이상 짜서 입어야 하고, 장화 속의 물을 열 번 이상 털어 쏟고 일하노라면, 물통 두 개는 금방 비어 버려 목은 타는 듯합니다(김태원, 「서독광부」, 재독한인글뤽아우프친목회 엮음, 『파독광부 30년사』, 1997, 188쪽).
석탄가루와 돌가루 등 분진도 그들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했다. 호벨이 한번 지나가면 지하는 석탄가루가 자욱했다. 거기다가 후미의 쇠동발을 뽑을 때 암반층이 무너지면서 엄청난 분진을 쏟아냈다. 1미터 앞을 보기가 어려울 때도 적지 않다. 분진은 얼굴과 작업복을 새까맣게 만들 뿐만 아니라 손톱과 발톱, 콧구멍, 귓구멍, 눈 속으로도 파고들었다.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도 ‘가루의 흔적’은 몸 어디엔가 남아 있었다. 코나 입 등을 통해 목구멍을 타고 폐, 허파 등 호흡기로 들어온 분진은 한국인에게 치명상을 가하기도 했다. 찌는 듯한 더위나 높은 노동 강도보다 정작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심하면 직업병인 ‘진폐증’이나 만성질환인 ‘규폐증’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씨 등은 분진의 위험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코담배’를 피우곤 했다. 작은 용기 안에 담긴 담배가루인 코담배는 코의 점막을 자극, 몸 속 석탄가루를 콧물과 함께 빠져나오도록 했다. 지저분하긴 했지만, 건강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분진의 위험과 높은 열기를 줄이기 위해, 작업장에선 전날 저녁에 석탄에 많은 물을 줘야 했을까. 원병호의 묘사다.
겨울을 얼마 남겨 두고 민주는 석탄에 물을 주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물을 주어도 엄청나게 주는 것이다.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하는 작업이다. 한명은 석탄에 약 2미터 길이로 구멍을 뚫고 다른 사람은 뒤에 오면서 그 구멍에다 물을 준다. 석탄에 물을 준다고 하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석탄층이 높은 막장에는 물을 많이 준다. 이것은 물을 주지 않을 경우, 석탄을 캐는 기계가 움직일 때 엄청나게 석탄먼지가 생기게 된다. 이 먼지로 인하여 앞도 분간하기 어려워, 일하기도 불편하여, 캐기 전날에 미리 물을 주며, 또 석탄에는 엄청난 열기를 가지고 있어 작업의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 열기를 식혀 주기 위한 것도 된다(원병호, 『나는 독일의 파독광부였다』, 한솜미디어: 서울, 2004, 265쪽).
호벨에 달린 특수 칼날은 석탄 덩어리를 힘차게 갉아대고, 전차바퀴 같은 철판 벨트는 컨베이어벨트인 판처(Panzer)에 석탄을 실어 나른다. 호벨이 전진함에 따라서 갱 바닥과 천장 사이에 빈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의 무너짐을 막기 위해 재빨리 철제 기둥인 스템펠(Stempel, 쇠동발)이 세워졌다. 쇠동발은 보통 50-60m의 막장마다 수 백 개씩 투입되었다. 호벨을 이용, 석탄을 캐며 전진하기 위해선 호벨이 지나간 바로 뒤에 계속 쇠동발을 세워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막장 후미에 세워진 쇠동발을 빼내야 한다. 즉, 후미의 쇠동발을 빼낸 뒤 호벨의 전진 속도와 방향에 맞춰 쇠동발을 세우는 게 채탄의 원리였다. 분실의 우려 때문에 숫자가 제한돼 있었고, 호벨의 전진 속도에 맞추려면 쉴새 없이 뒤에서 뽑아 앞에 세워야 했다.
특히 앞에선 1~3미터 두께의 탄층이 떨어져 나가는 사이에, 뒤에선 암석층이 계속 무너지기 때문에 작업은 한치도 늦출 수 없었다. 채탄부 노동자들은 바로 쇠동발을 뒤에서 빼내 앞에다 세우는 일과 탄을 모아 판처에 옮겨 나르는 일 등을 하는 사람들이다. 또 기계가 할 수 없는 일도 해야 했다. 즉, 작업을 진행할 수 없는 급경사 지역이나 극히 좁은 곳에선 ‘착암기’로 천공을 해야 하고, 화약도 발파해야 했다. 물론 기계 조작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서구인의 체형에 맞게 제작된 스템펠은 너무 무거웠다. 쇠동발의 무게는 보통 60킬로그램 안팎. 물론 가벼운 것은 40킬로그램짜리도 있지만, 무거운 것은 80킬로그램에 이른 것도 있었다. 평균 체중이 63킬로그램 안팎으로 알려졌던 한국인 노동자가 60킬로그램짜리 쇠동발을 하루 80개를 세우는 일은 고통 그 자체였다. 8시간 근무라면, 한 시간당 무려 10개나 세워야 한다는 얘기다. 여기에 모자와 특수 신발 등 다른 장구와 기계 무게까지 더해졌다면,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작업장이 평지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높거나 낮거나 또는 경사진 곳이라면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2미터 높이라면 서서 작업이 가능하지만, 50~150센티미터인 곳은 허리를 굽혀야 했고, 자연히 동발 들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영락없이 군에서 배운 ‘포복’을 하듯이 작업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김한용의 묘사다. 몸의 자세를 완전히 낮추고 자재운반을 해야만 했다. 땀은 흘러 눈을 뜨지 못하게 하고, 바지는 다리에 휘감긴다. 허리를 치켜들 수도 없고 군대에서 배운 포복으로 150m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김한용, 「호평받는 한국 광부들」, 『사상계 1964년 10월호』, 207쪽).
독일의 지하 1200미터 막장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을 울렸던 스템펠 작업. 독일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 광산 노동자 대부분이 지하에서 동발을 붙잡고 펑펑 울었다고 증언했다. 1966년 8월 파독한 김태원의 고백이다.
쇠동발을 뽑고 세우는 작업을 하는 한국인 광부 치고 이 쇠동발을 붙들고 울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면, 납득이 가겠지요. 지금도 힘겨웠던 그 순간을 상상하기만 하면, 현기증이 날 지경입니다. 체격이 우리 두 배나 되는 외국 광부들에 비해, 너무도 가냘픈 허리를 가진 우리들은 동작은 빨랐으나, 힘은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이 정도의 일을 했다면 한국에 앉아서도 큰 부자가 됐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김태원, 「서독광부」, 재독한인글뤽아우프친목회 엮음, 『파독광부 30년사』, 1997, 187쪽).
한국인들은 이역만리 독일의 지하 1200미터 막장에서 ‘땀과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자기 몸만큼 무거운 동발을 쉼없이 뽑고 또 세워야 했다. 그것은 목숨을 건 전투 자체였다. 동발공 뿐 만이 아니었다. 많은 한국인 광산 노동자들은 운반공, 기계공, 전공, 잡부 등으로 독일의 지하에서 푸른 청춘을 불살랐다. 그들이 흘린 것이 어디 땀뿐이랴. 지하 현장에 내려온 독일 광부들은 한국 광부들이 두 손으로 들기도 힘든 석탄 파는 기계를 한 손으로 들고 일을 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주눅들게 했다. 첫날부터 몸무게가 130킬로그램 정도 되는 나의 조원인 독일 광부는 한 시간 정도 석탄을 파내더니 65킬로그램의 나에게 삽으로 석탄가루가 내려가는 이동계단기계에 빨리 실어 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정신없이 삽질을 하면서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문질렀다. 갑자기 무리를 한 탓에 허리에 통증이 와서 조심스레 허리를 폈다. 그 순간, 달도 보이지 않는 지하 1000미터 막장 안에서 언젠가 무릎 위에 나를 누이며 귓밥을 파내 주며 ‘2대 독자인 장씨 집안에 시집와서 장남인 나를 낳고 시집살이가 휠씬 수월해졌다’며 ‘너는 나의 은인이다’며 좋아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가 떠오르며 눈물이 쏟아졌다. 그 지독하다는 해병대 훈련소에서도 보이지 않던 눈물이었다. 한 삽질에 눈물 한 방울, 두 삽질에 눈물 두 방울! 마음 속으로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가엾은 동생들이 떠올라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장재인, 『라인강변의 능금나무들』, 본, 2002, 38-39쪽).
1320호 14면, 2023년 6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