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연재] 해로

57회: “오래 기억되어 역사가 되는 사람들”

필자를 독일에 와서 파독 근로자로 오신 어르신들을 섬기는 봉사를 하도록 이끄신 분이 있다. 1세대 파독 광부로 오셔서 일하시다가, 공부하여 간호사가 되어 봉사하시고 은퇴하신 고 유충준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간호사 은퇴 후 한국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시며 샘물호스피스에 오셔서 2003년 8월부터 6개월가량을 봉사하셨다. 그런데 봉사를 마치고 다시 독일로 돌아오신 지 얼마되지 않아서 선생님이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선생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봉사하실 때, 독일에서 수고하신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한 호스피스 봉사가 조만간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한국의 샘물호스피스에서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탁하셨다. 그 말씀이 씨앗이 되고 노래가 되어 저의 마음에 남아 있었고, 20여 년이 지나서 파독 근로자로 오셨던 어르신들을 섬기기 위해서 필자를 독일에 오도록 인도하셨다.

자신이 부른 노래가 사라져 버린 줄 알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이 부른 노래가 친구의 가슴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는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의 “화살과 노래”라는 시가 생각난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생이라는 길을 만들어 간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존경하는 이들에게서 들은 말과 보고 배운 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고 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함께 살며 만나는 가까운 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그들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 동안 한 일과 말들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아도 어디에선가 민들레 홀씨처럼 떨어져 자라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하루하루의 시간이 매우 소중함을 느낀다.

고 유충준 선생님은 20년 전 한국의 호스피스가 불모지와 같은 상황일 때 오셔서 마지막까지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귀한 섬김과 큰 가르침을 주고 가셨다. 한국에 오셔서 봉사할 때, 말기 환자들에게 많이 발생하지만, 치료가 매우 힘든 욕창 간호에 대한 노하우를 간호사들에게 전수하여 주셨다. 그리고 환자들을 돌보는데 필요한 휠체어 변기와 여러 가지 욕창 방지용 보조 기구들을 만들어 주셨다.

6개월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말기 환자 케어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주셨고,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돌보는데 큰 도움을 주셨다. 잠시 시간을 내어 한국의 가을 풍경을 보기 위해 함께 여행을 하며 설악산의 화려한 단풍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한국에 가면 어딘가에 있을 선생님과 찍은 빛바랜 사진을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사단법인 해로에서는 작년에 제1회 “세대 공감 파독 사진 공모전”을 하였다.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관심과 성원 속에 사진전을 할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의 앨범에서 귀중한 사진을 꺼내서 보내주셨고, 그 안에 담긴 많은 추억과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이 사진들은 단순한 개인의 사진이 아니다. 한 장 한 장의 사진이 모여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불리는 파독 근로자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작은 사진이 모여 기록을 만들고, 이 기록은 또 역사가 된다. 세대가 지나가도 우리 파독 근로자 어르신들의 사진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기록물이다. 다음 세대들이 기억해야 할 문화적 유산이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자랑스런 우리 민족의 발자취이기도 하다.

올해도 사단법인 해로에서는 제2회 “세대공감 파독 사진 공모전”을 한다. 비록 심사를 거쳐 등수를 매기고 소수의 분들에게 자그마한 상밖에 드리지 못하지만, 그 의미와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빛바랜 작은 사진이 나의 앨범에 있을 때는 개인의 추억이지만, 꺼내 놓으면 그것이 곧 파독 근로자들의 역사가 된다. 아직도 많은 분들의 옷장과 앨범 속에는 파독 60년의 세월 동안의 많은 기록과 역사가 들어있을 것이다.

우리는 파독 근로자로 오셔서 인간승리를 이뤄내신 어른 세대의 삶과 노고를 다음 세대에게 보여주고 전수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장롱 속과 앨범에 갇혀 있다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역사가 되지 않도록 용기를 내어 꺼내어 세상의 기록과 역사가 되도록 빛을 보게 해야 할 것이다.

내년은 파독 60주년을 맞는 해이다. “세대공감 파독 사진 공모전”은 다음 세대에게 귀중한 교훈과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것으로 믿는다. 지금도 공부와 취업을 위해 독일로 오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들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독일로 오고 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큰일을 이룬 파독 근로자 어른들의 삶은 이런 젊은 세대들이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큰 위로와 용기를 줄 것이다.

올해도 “세대공감 파독 사진 공모전”을 통해 모든 세대가 함께 공감하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 파독 가족들의 많은 성원과 참여를 기다린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 5:19)

박희명 선교사 (호스피스 Seelsorger)

1276호 16면, 2022년 7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