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 아동을 소개 합니다

내 이름은 김성화 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영천 죽림사의 주지스님이셨고, 나의 형님은 영천 은혜사의 불교학교에 다녔습니다. 어느 날, 어머님이 막내동생을 출산 후,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병이 드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해 간호했지만, 가산만 탕진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마저 점심 식사 중에 피를 토하고 유언 한마디 없이 숨을 거두셨습니다.

고아가 된 니와 동생은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스님을 찾아 절로 들어가 사미승이 되었는데,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하루 일과는 고되고 혹독했습니다. 부모님이 그리워서 참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공부를 좀 더 해야 한다는 스님의 배려로 나는 대구로 나와 위도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였고, 대구 상고를 졸업하고, 경북대 수학과에 진학하여 어렵게 대학을 마친 나는 1965년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경북 울진에서 승려생활을 하던 중, 울진 중학교 삼진 분교에서 교사 자격증이 있는 나를 초청해 주어 교사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67년, 울진의 한 교회에서 수련회를 한다고 교실을 좀 빌려 쓸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승낙해 주자, 몹시 고마워하던 그들이 나를 점심 식사에 초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던 중에. 그 자리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목사님 한 분이 나를 한참 쳐다보다가, <선생님, 제가 느끼기에는 선생님께선 예수 믿고 목사가 되실 것 같습니다. 선생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너무도 황당하여 <헛수고 마십시오. 나는 뱃속에서부터 부처를 섬겨온 중입니다.>라고 했더니, 그 목사님은 개의치 않고,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에 나도 화가 나서 <나도 목사님이 머리 깍고 중이 되도록 불공드리겠습니다. 어디 누기 이기나 한 번 해봅시다.>라고 쏘아 붙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부터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역사의 시작이었는가 봅니다. 그분은 당시 울진군 원남면 매화교회 권찬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불교계에서 인정하는 승려가 되었고, 대한불교 정토정 불교 국장과 포교국장을 역임했습니다. 전 세계 불교국가를 두루 다니며, 신라와 고려의 흥황기에 융성했던 불교가 다시 일어나야 이 나라가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불교가 기독교에 밀려서 제대로 포교가 되지않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나는 불교대학 설립을 적극 추진하였습니다. 불교계의 유명인사들의 후원을 받아, 토지를 확보하고, 일본 불교에서 헌금 기부도 약속 받아 놓았습니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 교단내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휘말려 나는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나는 교도소 안에서도 불경을 읽으려고 도서담당교도관에게 신청을 했으나 그는 <불경을 구할 수 없어 성경을 가져왔으니, 한 번 읽어보시지요. 전 세계 수십억의 인구가 믿는 기독교에도 진리는 있으니, 한 번 읽어 보시지요. 나는 내일 제대합니다. 스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하고 성경을 놓고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괘씸하기도 하고 기독교인은 정말 지독하다는 생각과 함께 나 같은 골수 불교 스님에게도 전도를 하는 그들의 열의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빠져들었고, 고압 전류에 감전된 듯, 온몸이 뻣뻣해 졌습니다. 그렇게도 알고 싶어했던 생로병사의 문제가 성경에는 자세히 쓰여 있었습니다.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성경에서 느끼는 감동과 불교의 사이에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깨달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는 죽음은 숙명이라고 말하는 인간한계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는 것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생사화복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주었습니다.

나는 이 길을 깨달았지만, 차마 개종의 길로 들어 설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불교 종단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고, 수십만 신도들과 승려들이 나를 따르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배반하는 짓을 할 수 없었습니다.

1984년 8월 20일, 형기를 마치고 달성군에 있는 현수사에 몸을 의탁했습니다. 나는 기독교의 복음을 접한 후여서 마음속에 갈등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 후, 순천 송광사를 찾아가던 도중에, 교사시절에 동료였던 은두기 선생을 방문하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하였는데, 그는 나에게 <혜경 스님, 송광사를 찾아가도 그 번뇌는 사라지지 않지요. 돌아서려거든 한 나이라도 젊을 때 돌아서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고, 용단을 내려 개종키로 결심하였습니다. 내 인생 3분의 2를 달려가다 개종하기까지는 말 못할 아픔이 컸지만, 이것은 나 자신의 양심의 해방이자 자유를 찾는 회기적 결단이었습니다. 1984년 9월29일, 예배에 처음 참석하였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진정한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이 느껴졌고, 내 마음은 날아갈듯 가벼워 졌습니다.

그동안 참회하는 심령으로, <극락의 불나비와 나는 이렇게 예수를 믿게 되었다>등의 책을 썼습니다. 내가 이 간증을 쓰는 것은 바른 진리를 전하지 못하고, 거짓된 도를 전해 왔기에 그것을 밝히려는 것이며, 이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고픈 마음에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우리 인간에게 올바른 답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과거 혜경 스님이셨던 김성화 목사님의 간증 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드리는 오정희 아동의 부모님은, 3남매를 낳아 양육하다 불화로 이혼하였으며, 이후 막내는 엄마가 데려갔으며, 정희와 오빠만 아빠가 키우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다른 지방에서도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할머니가 두 남매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연로하시지만, 국밥집에서 일을 하고 있으나 소득이 미미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상황입니다.

정희 아동은 2023년 현재 초등학교 5학년 입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활동적이며, 베트민턴, 태권도 등 운동을 좋아 합니다. 오빠와는 말다툼도 자주하지만, 남매의 사이는 무척 좋은 편입니다. 아직 확실한 장래 희망은 없지만, 운동을 좋아해서 장래 체육전공으로 나가고 싶다고 합니다.

교민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는 정희 아동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박 해 철 선교사

1314호 34면, 2023년 5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