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먼저 인간입니다” 2026 복흠 한독 문화의 밤, 50년 씨과실이 피워낸 연대의 밤

2026년 1월 17일 토요일 오후, 루어(Ruhr) 공업지대의 심장부 복흠(Bochum) 성 요하네스 (St. Johannes) 행사장에 힘찬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독 복흠 한인회가 주최한 ‘2026 복흠 한독 문화의 밤(Koreanisch-Deutscher Kulturabend)’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이날 성 요하네스 홀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가득 찼고, 뒤쪽에는 서서 행사를 지켜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올해로 창립 51주년을 맞은 복흠 한인회의 역사는 곧 파독 광부•간호사 1세대의 역사다. 루어 지역의 광산과 병원에서 땀 흘리던 이들은 어려운 시절에도 우리 가락을 놓지 않았다. 풍물놀이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씨과실(碩果)’을 지키는 일이었다.

이번 행사에서 장경옥 단장이 이끄는 ‘두레 풍물단’의 ‘여는 마당’ 사물놀이는 그 씨과실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힘 있는 장단과 호흡은 행사장 공기를 단번에 깨우며, 이날 자리에 모인 이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모아 주었다.

우리는 국적에 앞서 먼저 인간이다인사말에 담긴 방향

이어진 이연우 복흠 한인회장의 인사말은 이날 축제의 방향을 분명히 짚어 주었다. 30년 넘게 독일에서 살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매우 소중하지만, 우리는 국적이나 문화적 소속에 앞서 먼저 인간입니다.”

그리고 한 문장으로 한인회의 지향을 정리했다.

“복흠 한인회는 한국문화를 매개로, 다양한 이웃이 만나고 이 도시와 함께 공공선을 만들어 가는 열린 시민 공동체가 되고자 합니다.”

이 회장은 복흠 중앙역 인근 철도 다리 위에 24개 언어로 “어디서(Woher)”와 어디로(Wohin)”를 비추는 조명 예술 작품을 떠올렸다.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대답은 우리 모두 다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지향하는 ‘어디로’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디로’를 지탱하는 원리는 다름 아닌 인간의 존엄과 인권, 민주주의와 레히츠슈타트(Rechtsstaat)이며, 그것은 독일인이나 한국인만의 특권이 아니라 이 땅을 밟고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가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민 통제가 강화되는 세계 곳곳에서, 이민자와 난민의 기본권이 쉽게 위협받는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며, 이런 때일수록 지역 공동체 수준에서라도 인간의 존엄과 연대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에 함께한 재독한인총연합회 정성규 회장은 축사에서 “복흠 한인회가 이렇듯 좋은 전통과 새로운 시도를 계속 성공적으로 이어 나가길 바란다”고 말하며, 지역 한인회가 만들어 가는 작은 실험들이 재독 한인사회의 미래를 여는 중요한 기둥임을 강조했다.

주독대사관 본분관의 장동령 참사관도 인사말을 통해 “본분관은 한국의 문화를 건강하게 확장하고 포용하는 ‘공공외교’를 적극 지원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고 전하며, 한인회와 지역사회의 다양한 시도가 한국과 독일을 잇는 공공외교의 소중한 현장임을 확인해 주었다. 이날 행사에는 심동간 재독한인글뤽아우프 총연합회 회장과 정운숙 재독 영남향우회 회장도 참석해, 복흠 한독 문화의 밤이 지역을 넘어 재독 한인사회의 중요한 연대의 장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국경을 넘는 연대 Omas gegen Rechts와 입양인 공동체

이러한 메시지는 초청된 귀빈들의 면면에서도 잘 드러났다.

극우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Omas gegen Rechts Bochum & West’는 올해도 함께했다. 뜨개질을 하며 손주에게 동화를 읽어줄 법한 편안한 모습으로 무대에 오른 이들의 ‘작은 새해 이야기(Neujahrsgeschichte)’는, 나이 든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파수꾼으로 나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짧지만 힘 있는 증언이었다.

한국 입양인 모임 KAD e. V.의 대표 마야 해어팅(Maya Haerting, 한국명 김현희) 씨도 자리를 함께하며, 한국계 입양인 공동체가 이 디아스포라의 중요한 한 축임을 조용히 드러냈다. 파독 1세대, 독일 할머니•할아버지, 한국계 입양인들이 한자리에서 서로를 소개하고 응원하는 모습은, 국적과 출신, 세대를 넘어서는 시민적 연대의 한 장면이었다.

아이들과 북소리, 그리고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2부 순서에서는 복흠 한글학교 학생들의 합창이 분위기를 따뜻하게 물들였다. 작년 행사 당시 교실을 찾지 못해 도움을 호소했던 신윤원 교장이 올해는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자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부른 ‘홀로 아리랑’의 후렴은, 이날 행사가 지향하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문화 교류의 장면은 계속 이어졌다. 이순덕 단원과 안덕(Dr. Müller) 부부가 ‘찾아가는 풍물 강습’을 통해 지도해 온 그룬트슐레 오버빈저펠트(Grundschule Oberwinzerfeld) 초등학생들의 북 공연이 그 예다. 작은 손으로 북채를 쥔 아이들의 장단에, 독일인 학부모들까지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며 한국 리듬에 동참했다.

이어 교포 2세 이윤태(키보드)와 독일 친구들 로베르트(보컬/베이스), 모르츠(드럼)가 꾸민 재즈 밴드 공연은 축제의 흥을 한 번 더 끌어올렸다. 세대와 국적을 넘나드는 신청곡이 이어지는 ‘노래방 타임’에서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사실상 사라졌다.

인간띠 행진과 ‘gerecht’한 행운

축제의 대미는 모든 참석자가 어깨를 맞대고 줄을 지어 행사장을 한 바퀴 도는 ‘인간띠’ 행진이었다. 신해철의 ‘그대에게’를 합창하며 춤을 추는 행렬은, 국적과 소속에 앞서 우리가 먼저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함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그대로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경품 추첨에서는 1등 행운이 한식 요리팀과 풍물패 사이를 오가며 행사 내내 궂은일을 도맡았던 장경옥 단장에게 돌아갔다. 사회자 윤용근 씨가 이를 두고 “이 정도면 정말 gerecht(공정한) 뽑힘 아닙니까?”라고 말하자, 객석에서는 웃음과 함께 자연스러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구에게 가도 이상하지 않을 선물이었지만, 복흠 한인회의 버팀목으로 묵묵히 수고해 온 이에게 돌아간 결과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 10시가 넘어 공식 순서는 끝이 났지만, 참석자들의 표정에는 쉽게 가시지 않을 온기가 남아 있었다. 50년 전 파독 1세대가 척박한 땅에서 지켜낸 씨과실은, 이제 한국인과 독일인, 1세대와 차세대, 입양인과 시민단체, 공관과 지역사회가 함께 나누는 공동의 자산이 되고 있다.

복흠 한독 문화의 밤은 규모로 보면 크지 않은 지역 행사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디서 왔는가”보다 “어디로 함께 갈 것인가”를 묻는 이 밤에, 서로 다른 길에서 온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만들어낸 인간띠는 아직은 작았지만 분명했고, 그래서 더 귀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며, 함께 걸을 수 있는 ‘우리’는 여전히 가능하다.

그 작은 확신이, 복흠이라는 도시와 재독 한인 사회 안에서 앞으로의 수십 년을 여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기사제공: 복흠한인회

※ 이 글은 2026 복흠 한독 문화의 밤을 계기로, 복흠 한인회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모습과 행사의 주요 장면을 함께 정리한 기고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