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기획기사
독일 속에서의 독립운동을 찾아 (4)

1920년대 독일속의 한국인들

교포신문사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아, “독일 속의 독립운동을 찾아”라는 제목으로 기획기사를 10월 한 달 총 4회 연재한다.
“독일 속의 독립운동을 찾아” 기획기사는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독일 및 유럽 동포언론을 망라해서도 최초로 시도하는 기획기사로서, 100년전 독일에 거주했던 한인들이 조국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도 함께 조망해 본다. -편집자 주

독일은 일제강점기 한인들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나라다.
현지 언론에도 기록이 남지 않았고, 한국에도 관련 자료가 거의 없다.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주도한 이극로 선생과 ‘압록강을 흐른다’를 쓴 이미륵 선생 등이 독일에서 벌인 활동의 일부 등이 입증된 정도다.
독일에 거주하는 민간인과 유학생들도 1920년대 한때 최대 80여 명 정도에 불과했던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탓에 한인들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는지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독일에서의 독립운동이 그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해온 이유다.
재독 유학생모임인 유덕교려학우회에서 1920년부터 당시 교민의 수를 조사했는데 이 조사에 따르면 1923년 독일 전국의 한인거류인은 55명, 유학생이 10개 대학에 33명 , 총 88명이 독일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1924년한인 유학생 수는 58 명, 25년 4월 조사록에는 52-.3명으로 추산되었다.
이번호에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20년대 독일 속의 한국인들에 대해 소개한다. 이번 연재에는 레겐스부르크에 거주하는 김영자(Dr. Beckers)박사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알린다.

1920년대 독일 속의 한국인들

1919년 3.1운동후부터 능력 있는 청년들을 해외유학을 보내는 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기미육영회’가 대표적이다. 이 유학재단에서 유럽으로 유학을 보낸 중에 독일에는 안호상(Jena 대학), 이극로 (Berlin 현 흠불트대학) 등이다.

기미육영회는 1919년 11월 부산에서 안희제 등 백산상회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한 부산·경남 지역 유지 40여명이 조직한 장학재단이다. 이들은 1919년 3·1운동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교육 보급, 인재 양성, 민중 계몽이 급선무임을 깨달았다. 이에 장차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우수한 청년을 선발하여 국내 및 국외에 유학시킬 목적으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설립하게 되었다.

기미육영회가 발족한지 6개월 후인 1920년 5월 회원이 43명에 이를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1920년 경제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고, 1921년 이후에는 육영사업이 원활하게 지속되지 못하였다.

기미육영회는 회원 부담금으로 국내 및 국외로 유학생을 파견함으로써 장차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매년 10명씩 유학생을 선발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1차 유학생으로 김정설·이병호·이제만·전진한·문시환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안호상·이극로를 독일, 신성모는 영국으로 파견하였다.

물론 개인적으로 자비유학을 한 한인 젊은이들도 적지 않았다.

기미육회에서 독일로 유학보낸 3인의 모습
독일에서 학위졸업식 날의 이극로 (왼쪽), 안호상(가운데), 신성모(오른쪽)

베를린을 중심으로 모인 한인들

김현준(金賢準): 한국 사회학의 개척자
김현준은 1920년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에 유학하여, 뷔허(Bucher) 교수가 창설한 신문연구소에서 신문학 강좌를 수강하는 한편, 에베르트(Everth,E.)교수의 지도 아래 연구에 정진했다.
1928년「동아시아(한국·중국·일본)에 있어서 근대신문의 생성발전에 관한 연구」로 학위논문이 통과되어 한국인으로서는 첫 신문학박사가 되었다. 이 논문은 한·중·일 3국의 주요 신문에 대한 생성과 전개를 연구한 비교신문사(比較新聞史)의 최초 작업으로 공인되었다.
귀국한 후에는 『동광(東光)』 제34호에 국내언론계에 대한 제언으로 ‘학술적 전문잡지가 필요’를 발표하였고, 1932년 신문간행의 이론적 학술화를 열망하는 충정을 보였으며, 『신동아(新東亞)』를 통하여 ‘시위운동과 군중심리’(1931)·‘투서(鬪暑)와 봉사로써’(1934)·‘현대사회사상의 동향’(1935) 등의 기고로 사회현상의 해명에 학구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사회철학자로서 광복 전까지 보성전문학교에 출강하였고, 광복 직후 성균관대학 학장과 전주사범학교 교장을 거쳐 조선대학 문리학부장으로 재임 중 좌익계의 저격으로 사망하였다. 사회철학이론 정립의 저서로 1950년 대성출판사에서 간행한 『사회학개론』이 있다.

 

김중세 : 1882년생으로 1900-1904 성균관 경학과, 1905-8년 일본 유학, 1909년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했다. 1926년 Leipzig대에서 철학. 고전학과 학위를 받았다.
11살 때부터 이미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독일 유학을 목적으로 또한 독일어도 배웠다.
1928년 귀국하여, 1929-1932 일본 경성제대에서 강사, 서울 연희전문에서 김중세를 교수로 초빙하려 했으나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무산 되었다고 한다. 64세로 1946년에 세상을 떠난다. 김중세의 국내에서 활동상은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황기환 : 1904년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군인이 된다. 제1차세계대전 때 참전, 미군소위 자격으로 베를린에서 근무를 한다. 1919년 파리임시 위원회 김규식 위원장이 불러 파리로 떠나서 파리 위원회 서기장으로 일한다. 김규식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황기환에게 위원장 대리 겸 서기장 임무를 맡긴다. 위원회를 활발하게 운영하다 1923년 4월 8일 심장병으로 사망하면서 파리 위원회가 극도로 약화된다. 다른 설에 의하면 황기환이 1921년 7월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황기환이 베를린에서 얼마동안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황기환이 제1차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난 후 파리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

 

안봉근 :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봉근은 1920년 이의경(필명 미륵)과 함께 상해에서 배를 타고 1920년 5월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한다. 독일 베네딕트회 Wilhelm신부의 도움으로 독일로 망명을 한다. 그 후 베를린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고 전한다.
안봉근은 일찍부터 천주교 신부를 따라 유럽을 다니면서 선교기금을 모우는 신부 가까이서 도왔기 때문에 영어, 독일어, 일본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당대 매우 드믄 한국의 젊은이였다.
독립운동을 하던 안봉근은 일본경창의 감시를 피해 이름도 중국명 Fonken Han(한봉근)으로 바꿨으나 일본영사관의 감시는 계속 따라다녔다.
안봉근은 베를린에서 독일 여인과 결혼을 하고 두부공장을 운영하면서 근근히 생활을 하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에서 1위를 한 손기정과 3위를 차지한 남승룡을 자기 두부공장에 초대해서 태극기를 걸고 격려를 했으며 지역 신문사를 찾아가 손기정과 남승룡이 한국인이라고 정정을 요구하기도 했다(손기정 자서전에서). 그는 어디서고 어떤 경우에도 조국의 존재를 알리는데 앞장을 섰다. 안봉근은 일경의 감시망이 지속되는 히틀러 정치를 피해 이탈리아로 떠나 상과대학으로 전과를 했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해방직후 안봉근은 이탈리아에서 갑자기 사망을 했다고 한다. (자료: 손관승의 인터넷) 안봉근에 대한 연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안중근 가족사에서)

 

뷔르츠부르크의 한인들

920년 후부터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 모인 한국인 유학생은 30여명이었다고 한다. 뷔르츠부르크는 유럽으로 건너오는 한인들의 해외 통신처였다.
그들 대부분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 와서 생활도 넉넉한 유학생들은 자동차를 타면서 꽤 화려한 생활을 했던 듯하다. 그러나 1925년 독일 마르크의 폭락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이들 중 일부는 귀국을 하거나 미국, 영국. 프랑스 나라로 떠났다.

백성욱: 불교와 독립에 바친 삶
1897년 서울서 태어난 백성욱은 “장차 20만 명의 조선청년을 깨우치는데 평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안고 유럽으로 떠났다. 1920년 백성욱은 24세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독일어, 라틴어 등을 익힌 그는 다시 독일의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학문연구에 몰두한다. 고대 희랍어, 독일 신화사(神話史), 천주교 의식 등을 공부하며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불교>에 많은 글을 발표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봉직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등 불교계에 끼친 영향이 크다. 또한 해방 후에는 동국대 교수, 내무부 장관, 동국대 총장을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고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았다. 1962년부터는 경기도 부천에서 백성농장을 경영하며 불법(佛法)을 펴고 중생을 인도하다 1981년 9월16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용제 : 1896년 함흥에서 태어난 이용제는 1920년 6월 11일 동료 한수룡과 함께 상해로 망명을 한 후, 12월 14일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한다. 이 배에는 중국인 유학생 외에 21명 한국 젊은이들이 타고 있었다. 각자 목적지로 향해 독일이나 프랑스에 남는다. 이용제 역시 일단 프랑스에 도착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이용제는 노동일을 하면서 고학을 한다. 1922년 여름에 독일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친구 한수룡을 찾아간다. 그 당시 Wuerzburg에는 한인 유학생이 약 30여명이 있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이용제도 등록을 한다. 친구에게 신세를 지면서 학업을 계속하기에 부담을 느끼고 파리로 다시 떠난다.
파리에서 병원에서 오전만 근무를 하고 오후에는 어학공부를 했다.
1935년 이용제는 파리 불문학 학사, 1942년까지 음성학. 언어학 전공을 했다. 1936년 프랑스 15세 연하의 여인과 결혼 3남2녀를 두었다. 무국적으로 살다 1986년 세상을 떠났다. 남북분단의 국적을 거절하고 프랑스여권도 받지 않았다.

 

정석해 : 중국 상해를 거쳐 프랑스로 건너온 유학생이다. 선천의 신성학교에서 수학하고 1916년 교원자격 시험에 합격하여 청성 프랑스인이 경영하는 소학교 교원으로 부임한다. 1919년 연희전문 YMCA 회장으로 3.1.운동에 가담해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3.5일 남대문 역두시위를 주동했다.
일경에 쫓겨 3.18일 만주 안동현으로 피신, 1920년 베이징을 거쳐 상해 흥신단에 가입, 같은 해에 서양 유학을 결정하고 유법겸학회의 주선으로 1920년 11월 7일 프랑스 해운사의 여객선 Le Portos호를 타고 12월 14일에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한다.
정석해는 파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 독일 베를린과 뷔르츠부르크에서 유학한다.
1922년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정치경제학부에서, 1923년은 베를린에서 공부를 하다가, 1924년 파리에 돌아와서 철학과에 입학하여 사회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1930년 파리대학에서 수학과 철학공부를 마친 후에도 대학에 머물렀다.
1939년 19년 만에 귀국, 연희전문학교 교수, 변절한 동지의 밀고로 체포되어 동경으로 압송, 그해 12월에 석방되어 가택감금, 1945년 해방과 함께 연희전문대학 교수로 근무하였고, 1961년 퇴직. 퇴임 후 미국으로 떠났다.

 

뮌헨과 예나의 한인유학생

김재원 : 1909년 함흥에서 출생한 김재원은 1929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한다. 잠시 뷔르츠부르크대학을 거쳐, 뮌헨에서1929년부터 1934년까지 5년간 수학을 했다. 1934년부터 1940년까지 벨기에 켄트대학 헨체(Hentze, C.) 교수를 사사하고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봉직하였다. 광복 후 국립박물관장에 취임하여 1970년 퇴임하기까지 박물관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김재원은 뮌헨 유학생활 당시 이미륵박사에게서 독일어를 배우고, 대신 가난한 이미륵의 월세에 보탬을 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귀국해서는 이미륵에 대한 소개를 국내에 처음 알렸다.

 

안호상 : 1925년부터 구동독 예나대학교 Jena에서 철학과와 법학과에서 공부하고 1929년 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후 잠시 예나 대학교에서 훔볼트 학술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연구원생활을 하다가 1930년 귀국을 한다. 우리민족뿌리 찾기에 평생을 바친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나, 조선어학회사건과 녹지연맹사건 등에 연루되는 등 연속되는 반일행위로 인해 관헌의 일급 수배자로 지목되었다.
집안문제와 지병으로 인한 휴직과 복직의 와중에서도 1942년『철학개론』을 출간하고 헤겔철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1945년에는 가족들도 모르게 금강산으로 숨었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5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거쳐, 1948년 정부수립 때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했는데,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으로 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019년 10월 25일, 1144호 20-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