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 / 115

한국 여성계의 선각자들 ③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 최승희

최승희는 서구식 현대적 기법의 춤을 창작·공연한 최초의 인물로 8·15해방 이전의 한국무용계를 주도하며, 민족성을 토대로 형상화되어진 그만의 독특한 기법을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무용가이다.

최승희는 숙명여고 시절 일본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그의 춤에 매료되어 무용가의 길을 걷는다. 일본에 유학해 서양 모던댄스를 체득한 후 조선의 전통과 접목해 신무용이라는 새로운 춤사조를 창출한 춤의 선구자다.

1927년 가을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공연할 때 한병용과 함께 출연했고 1929년 이시이와 결별하고 귀국하여 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졌다. 이 공연은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었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 뒤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공연을 했고 1931년 문학가인 안막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후 경성에서는 창작 여건이 어려워 1933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게 된다.

34년 9월 일본 청년회관에서 그녀의 첫 무용발표회가 열렸는데 이때 발표한 〈거친 들판에 가다〉·〈칼춤〉·〈승무〉 등은 조선의 정취를 담았다는 찬사를 받았다.

1936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무용가의 포부’에서 최승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의 포부는 조선의 존재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한편 우리가 가진 특유한 무용예술을 세계에 진출시키는 데 잇습니다…. 조선의 춤을 소재로 삼고 그것을 자기의 예술적 기능으로 가능한 범위의 무용으로 양식화하기를 힘쓰려 합니다.”

1937년 12월 미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최승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를 경영하는 메트로폴리탄 뮤직컴퍼니와 전속계약을 맺고 6개월간 전미 순회공연을 갖는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에서 23회, 벨기에에서 9회, 네덜란드에서 11회, 독일에서 2회 공연했으며, 1940년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를 시작으로 61회의 중남미 공연을 펼쳤다.

프랑스 파리에서 초립동 춤을 공연한 후 그의 초립동 모자는 파리에서 유행이 될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피카소는 최승희를 그림으로 남겼고, 앙리 마티스, 찰리 채플린, 로맹 롤랑 등이 최승희의 팬이 됐다. 할리우드에서 영화출연 제의도 쏟아졌다.

최승희가 정립한 신무용은 한마디로 ‘전통의 현대화’의 산물이었다. 그는 신무용을 무기로 미국과 유럽, 남미에까지 진출해 우리 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 떨친 애국자였다. 일제강점기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해 세계적 스타가 된 예술가는 아마도 최승희가 유일하지 않을까.

한국 무용사에 있어서 신무용은 무대예술로서의 무용예술이라는 장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최승희는 신무용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인물로서 일제시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관람한 후 도일하여 일본 신무용(현대무용에 토대를 둔)을 배워 한국 신무용의 문을 열었던 인물로 무용사에 기록되어지고 있다.

이후 최승희는 20세기 초 New Dance에서 비롯된 자유로운 춤의 형식이라는 현대무용 정신을 수용하여 한국 민족의 정신을 수용한 새로운 신무용 형식을 창작하기에 이른다. 즉, 최승희만의 독특한 예술성에 힘입은 새로운 한국 창작무용을 발표함으로써 한국 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신무용의 탄생을 일구었던 최승희는 당시의 무용에 대한 인식 변화를 유도했던 인물로 평가 받는다. 새로운 예술장르로 탄생된 신무용은 이제 본격적으로 무용을 수행하는 자를 예술가로 인식하는 변화를 꾀했다. 따라서 사회에서 무용가를 예술가로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무용예술을 통한 예술운동이 한 나라의 민족성을 나타낼 수 있다는 인식을 유도하게 된다.

또한 최승희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한국의 민족무용의 부흥에 기여한 점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의 창작 작업에 한국 민족성, 한국 사회의 풍토, 한국 전통무용, 한국 전통 음악, 한국 전통 의상 등과 같은 소재들은 최승희의 재해석을 통해 민족무용의 틀을 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술이란 항상 그 시대의 시대의식과 예술가들의 사회와 문화,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의해 새롭게 형식화 되어지는 것이 예술사를 통해 증명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승희는 일제시대라는 암울한 시대에 끊임없이 한민족의 사상과 사회문화에 대한 탐구를 통해 한민족의 전통 춤을 민족무용이라는 예술형식으로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즉 무용의 새로운 기법의 탄생과 새로운 기법의 정립, 학문적 정립 등을 통해 최승희는 한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기법을 완성하였다.

한국무용사에 있어서 세계에 한국무용을 알리는 역할을 최초에 수행한 인물이 바로 최승희였다는 점도 그를 높게 평가하야야만 하는 이유이다. 최승희의 예술 활동은 미국공연을 필두로 유럽공연, 남미공연, 중국공연 등 수 많은 해외공연을 통해 한국무용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유럽이 세계 제2차 대전의 시작과 함께 최승희는 미국 공연을 가게 되는데, 이때 최승희는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세인트 제임스 극장에서 화려한 재기를 하게 된다. 이때 최승희 공연에는 유명한 예술인들도 관람을 하게 되는데 소설가, 존 스타인벡, 배우인 로버트 테일러, 찰리 채플린 등이 공연을 관람하였으며, 이때 로버트 테일러에 의해 영화 제의를 받기도 했다.

이와 같이 최승희는 한국무용을 세계에 알리며 당당히 세계적인 무희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한국무용사에 있어서 최초로 한국무용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무용수라고 평가받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에 ‘황군’위문 공연을 다니고 거액의 국방헌금을 헌납했던 그는 광복 후 친일파라는 비판에 직면한 뒤 월북했다. 그러나 그의 남편 안막이 숙청의 덫에 걸린 뒤 1960년대 후반 최승희도 결국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적 격동기에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지만 친일과 반일, 분단이라는 민족적 아픔과 시대적 상황 속에 갇혀 아까운 생을 마감해야 했던 것이 그녀의 운명이자 우리 무용계의 운명이었다.

1289호 23면, 2022년 1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