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윌리엄박물관과 고려청자

유럽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유럽 박물관을 다녀와서는 “왜 유럽 박물관의 한국관은 그렇게 초라한가?”라는 말을 많이 한다. 유럽의 한국박물관은 중국관과 일본관에 비해 너무 작고 전시품도 초라한 건 분명 사실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물이 조금 더 큰 공간에서 자랑스럽게 더 많이 전시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그러나 영국 최고의 명문 대학인 케임브리지대학교 소속 피츠윌리엄박물관의 한국관은 예외적으로 한국관이 중심이다. 피츠윌리엄박물관의 한국관은 주위의 중국관과 일본관을 수하로 거느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유럽 박물관에 가면 한국 유물이 별로 없고 독립관은 생각할 수 없는 곳도 많다. 대개 아시아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 유물들 옆 귀퉁이를 그냥 조금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피츠윌리엄박물관의 아시아관은 그 반대이다. 고려청자가 공간의 거의 70~80%를 차지하고 중국과 일본 유물이 귀퉁이로 밀려나 있다.

피츠윌리엄박물관의 최고 수준 고려청자

피츠윌리엄박물관의 고려청자 수준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다. 박물관 웹사이트가 자랑하듯 ‘한국 밖에서 가장 훌륭한 고려청자 수집품(the best collection of Koryo celadon outside of Korea)’을 가지고 있다.

여기의 고려청자는 영국박물관 한국관의 영국 겨울 하늘 같은 잿빛의 청자가 아니라 정말 청명한 한국 가을 하늘 위에 흰구름이 떠 있듯 상감의 흰 무늬가 새겨진 최고 수준의 청자이다. 만일 독자 중에서 케임브리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피츠윌리엄박물관의 한국관은 반드시 방문해 보시길 강추한다.

피츠윌리엄박물관의 한국관 청자들은 정말 한국 말고는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런 최고 수준의 청자 432점은 바로 한 명의 아마추어 청자 애호가에 의해 수집되어 피츠윌리엄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바로 고드프리 곰퍼츠(1904~1992)라는 영국인 회사원이 일제강점기 때 조선과 일본에서 수집한 청자들이다.

그는 지금의 영국 셸석유회사 일본주재원으로 도쿄에서 주재하던 중 1927년 조선으로 1년간 파견되었다. 원래 중국과 일본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운명처럼 고려청자를 만나게 됐고, 이후 첫눈에 푹 빠져서 거의 재산을 탕진하면서 집중 수집했다. 그런 그에게 조선이 제2의 고향이 되는 행운도 있었다. 평생의 반려자를 조선에서 만난 것이다.

미국 선교사의 딸 엘리자베스를 만나 조선 파견이 끝나고 같이 일본으로 돌아와 1930년 도쿄에서 결혼했고 신혼여행을 조선으로 다시 왔다. 부부는 매년 여름휴가 한 달을 조선에서 보냈는데 특히 금강산을 너무나 좋아해서 올 때마다 반드시 갔다. 그만큼 부부는 조선과 조선 문화를 사랑했다. 2차대전 발발로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수집한 고려청자 일부를 피츠윌리엄박물관에 장기임대해서 전시하게 했다.

1984년 한·영 수교 100주년을 맞아 곰퍼츠 부부는 임대된 청자 428점을 비롯해 중국·일본 도자기를 비롯한 다른 수집품도 전부 기증했다. 만일 이 정도 수준의 고려청자면 한 점당 1억원 이상의 가격이었을 텐데 400억~500억원 가치의 소장품을 아무 조건 없이 기꺼이 기부한 것이다. 부부가 가장 사랑해서 거실과 침실에 두었던 마지막 4점마저도 1992년 부인 엘리자베스가 세상을 뜨자 부인 이름으로 기증하고는 같은 해 곰퍼츠는 엘리자베스를 따라갔다.

그는 1961년 고려청자 책(‘The Ceramic Art of Korea’)을 김재원 박사와 같이 냈고, 1964년에도 혼자서 고려청자 관련 책(‘Korean Celadon’)을 썼다. 1968년에도 고려청자 책(‘Ceramic Ware’)을 내는 등 평생을 고려청자와 같이 지냈다. 또 1961년 런던 V&A박물관에서 유럽 최초로 한국 국보급 예술품 152점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도 곰퍼츠는 당시 초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김재원 박사를 도와 대성공을 거두게 했다.

우리가 고려청자의 가치를 전혀 모를 때 곰퍼츠는 평범한 월급쟁이로서 거의 가산을 탕진하듯 수집을 했다. 덕분에 432점의 주옥같은 고려청자가 돈 많은 누군가의 수장고에 처박혀 있지 않고, 이렇게 공공박물관에서 우리 문화를 오늘도 우리를 대신해 소개하고 있다.

일본인이 먼저 알아본 고려청자의 가치

사실 조선시대에는 고려청자의 존재를 몰랐다. 우리보다 자기에 눈이 더 밝았던 일본인들이 우리 도자기의 가치를 먼저 알아챘다. 해서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보물이 일본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제가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눈 밝은 일본인들은 조선 전국을 뒤지며 고려청자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성에 안 차자 도굴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수집했다. 그전까지 조상 숭배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던 조선에서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악행이었다. 그렇게 해서 고려청자는 일본인들 덕분에 세상의 빛을 억지로 보게 되었다.

일본인 중에서도 조선 초대총감 이토 히로부미가 가장 많이 수집을 했다. 수천 점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수하를 시켜 보이는 대로 끌어모으라고 해 수천 점을 수집했다. 그중 가장 쓸 만한 청자만 1000점이 넘었다. 고종이 일제가 세운 왕가 박물관을 순시하다가 고려청자를 보고는 어느 나라 작품이냐고 물을 정도로 조선인들은 무식했다. 결국 우리가 우리 것에 무지해서 우리의 보물을 제대로 간직하지 못한 셈이다.

곰퍼츠가 고려청자를 수집할 때만 해도 청자 값은 정말 헐값이었을 터다. 해서 평범한 영국 회사원이 432점이나 수집을 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세계인은 피츠윌리엄박물관에서 우리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경제력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문화를 가진 선진 민족이란 걸 자랑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한국에 대해 무지한 세계인들도 이제 싹이 트기 시작한 K-열풍으로 겨우 한국을 알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갈 길이 한참 멀다. 구미인들은 한 민족을 평가할 때 최종적으로는 문화 수준을 따진다. 훌륭한 문화를 가진 민족만을 정말로 자신들과 괄목상대할 민족이라고 믿는다.

1369호 30면, 2024년 7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