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광장들 (9)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광장(Piazza di San Marco) (1)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천년 고도

베네치아, 베니스, 베니세, 베네디히, 400개가 넘는 다리와 수많은 운하로 이루어진 이 도시를 지칭하는 말이다. 현재도 축제와 신혼여행의 도시로 알려진 이 도시는 예부터 오랫동안 세상의 모든 부가 모여들었고 도시 가운데 대운하 주변의 궁궐 안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축제가 날마다 열렸다. 그러나 궁중의 번영과 영화는 거대한 수상도시 일면에 불과하고 베네치아의 밝은 모습 뒤에는 과거부터 이어진 약탈과 침략의 흔적이 남아 있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피난과 함께 시작된다.

기원후 450년경 해안가에 살고 있던 수많은 로마인들이 야만족인 운니족으로부터의 습격을 피해 육지로 부터 도망친다. 그들은 마침내 베네치아 주변 섬에서 피난처를 발견한다. 습지와 말라리아로 인해 그들은 침입자들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른 어려움을 만난다. 습지와 물 한가운데 어떻게 하면 집을 지을 수 있을까? 베네치아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해저에 나무토막을 박고 그 위에 기초 공사를 했다. 물론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60개의 교회와 수많은 집들이 바다 속에 수장되었다. 그러나 차츰 기술이 축척되었고 석주위에 도시가 형성 되었다.

베네치아는 바다로 진출하는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범선과 곤돌라가 건조되었고 무역선단이 생겨났다. 점차 대담한 베네치아인들은 멀리 떨어져있는 오리엔트까지 항해했다. 점차 교역로가 확장되었고 항해는 카나리아 제도와 세네갈까지 이어졌다.

베네치아 역사에 가장 유명한 탐험가는 마르코 폴로 였다. 13세기 중엽, 1271년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아버지인 니콜로와 함께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으며 쿠블라이 카의 궁전에서 보낸 환상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27년 후에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렇게 해서 동방무역은 점점 더 증가되었고 베네치아는 점차 유럽 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인도로 부터 후추가 들어오고 러시아로부터는 모피가 수입 되었으며 오리엔트로 부터는 비단이 유입되었다. 아케이트가 있는 길가에는 환전소와 금은 세공품점이 생겨나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운하 한가운데 있는 리알토 다리는 과일가게와 채소가게가 넘쳐났다. 1400년대 초에는 전 아드리아 바다를 제패하여 일대 강국으로 발전한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베네치아의 대부분의 도시 모습이 이때 만들어진다. 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성 마르코 광장과 동양과 서양이 함께 어우러진 듯한 모습을 한 성 마르코성당. 또 아름다운 외관의 베네치아 고딕양식의 진수인 두칼레 궁전 등이 대표적이다. 무역으로 인한 동양과의 접촉은 중세의 베네치아를 독자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양식인 베네치아 고딕으로 발전시켰다. 이 양식은 비잔틴 양식의 돔, 이슬람 양식의 첨탑과 아치와 사엽 장식에 초점을 둔 유럽 고딕 양식을 혼합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성당 산 마르코 성당을 직접 살펴보자.

동서양의 만남 바실리카 디 산 마르코(Basilica di San Marco)

베네치아를 방문할 때 처음 도착하는 곳은 산타루치아역(Stazione Venezia Santa Lucia) 이다. 여기서 증기선 수상 버스인 바포레토 라인 1번을 타고 그랜드 칸넬(Grand canel, 대운하)을 통과하다 보면 운하를 가로 지르는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가 나온다. 베네치아경제의 중심지였다. 원래는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였는데 화재로 인해 소실되자 안토니오 다 콘네가 1591년에 다시 만들었으며 19세기까지 대운하의 양쪽 둑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였다.

이 대운하 양쪽으로 12-18 세기에 걸쳐 세워진 옛 귀족들의 궁이 2백 여 개 늘어서 있다. 계속해서 운하를 따라가다 바다가 보이는 끝 언저리에 도착하면 왼쪽에 광장이 나타나며 화려한 두칼레 궁과 산 마르코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베네치아에서 유적순례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대성당은 동방의 여러 국가들과 독점적 교류관계를 가졌던 해양국가의 특성을 살려 동양과 서양의 건축기술을 완벽히 조화한 양식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특히 성당의 안 밖의 여러 화려한 장식품들이 일찍이 동방에서 가져오거나 빼앗아 온 전리품들임을 상기해 본다면 수세기 동안 베네치아가 누려온 동방국가에 대한 지위를 짐작 할 수 있다.

아드리아해를 장악해 무역을 통한 엄청난 부를 오래 동안 누려왔고 가까이는 그리스, 멀리는 콘스탄티노플까지 원정해 노획한 수많은 전리품들을 다름 아닌 바로 이 성당 내 외부에 장식품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 여기저기서 눈으로 확인된다. 약탈과 노획문화의 결과인 셈이지만 부러운 점은 이국적인 여러 문화를 소화해 새로운 베네치아양식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그 예로 성당 지붕을 구성하는 십자로 배치된 다섯 개의 돔은 비잔틴 양식으로 이루어져 교회 외관을 대단히 화려하게 보이게 하며 수많은 이슬람 양식의 아치와 첨탑, 정면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입구와 어우러져 이국적인 조화를 이루어 낸다.

이 걸작은 13세기에 비잔틴 예술과 건축에 심취한 베네치아 장인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성당 정면을 바라보면 성당 현관문 위에 섬세한 모자이크로 그림이 표현되어 있다. 중앙현관의 장면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이송되는 성 마가의 육체를 보여준다. 바로 이 성당의 건립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성당은 처음부터 도둑질에 의해서 건축

9세기 초 두 명의 베네치아 상인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성인 마르코의 유골을 석관에서 훔쳤다. 그들은 유골을 돼지고기와 함께 통속에 감추고 별 어려움 없이 세관을 통과했다. 당시에 이슬람 신자는 돼지고기를 먹지도 만지지도 않는 점을 이용했던 것이다. 무사히 훔쳐온 유골은 베네치아로 옮겨져 왔고 곧바로 땅속에 묻고 그 위에 교회를 건축했다. 도둑이 도둑을 걱정한다고나 할까? 훔친 유골이라 다시 도난 맞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지금 베네치아에서 보는 성당은 이때 지은 성당은 아니다. 처음 성당의 화재 후 11세기에 다시 축성 된 성전이다. 마르코를 수호성인으로 하여 지어진 교회는 성 마르코 교회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광장의 서쪽에 장엄하게 서있다. 시작은 도둑질로 이루었지만 지금은 긴 베네치아의 역사를 간직한 중요한 인류문화 유산이 되어있다.

다음호에도 계속해서 성 마르코 광장에 대해 알아보자.

<캡션해설>

그림 1)

베네치아 운하 항공사진 :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 사이로 작은 운하들이 보이는데 그중 제일 큰 운하가 S자로 도시를 관통하는 모습이 보인다. 운하 끝나는 곳에 빈 터가 산 마르코 광장이다.

그림 2)

바포레토 (수상버스) 위에서 바라본 그랜드 칸넬 (대운하) : 산타루치아역에서 바포레토를 타고 산 마르코 광장까지 가는 여정 중에 운하 주위에 세워진 12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다양한 건축물 (귀족들의 궁전)을 볼 수 있다.

그림 3)

산 마르코 광장에서 바라본 산 마르코 성당 전면 : 로마네스크양식 현관 입구에 비잔틴 양식의 중복된 돔들. 수많은 이슬람 양식의 작은 첨탑의 장식등. 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조화로움이 성당 외관을 대단히 화려하게 장식한다.

2020년 4월 24일, 1168호 20-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