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의 현대무용
1) 초기 표현주의
초기 독일의 표현주의 무용의 시기는 1910-1930년대 사이, 즉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시기로 표현주의 무용의 기초는 자연적인 움직임이 핵심이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그 자체가 무용의 실체임을 증명한 사람은 마리 뷔그만(Mary Wigman) 이었다.
1886년 하노버에서 태어난 마리 뷔그만은 작크 달크로즈와 라반의 지도를 받았다. 그후독창적인 개념을 개발시키고자 그들의 테두리를 벗어나 1924년부터 독일무용계의 제1인자로 위치를 확고히 했다. 당시 뷔그만 무용 성격을 잘 대변해 주는 말로는 「음악 없는 무용」,「긴장과 완화」, 「공간」, 「표현주의 무용」 등이었다. 무엇보다도 다이나믹한 동작과 무용에 있어서 동작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충분함을 강조했다.
그녀는 자기가 구성한 작품에서 최초로 음악이 배제된 채 움직임만이 있는 무용을 시도하였으며, 주된 구성은 긴장과 완화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움직임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황폐해진 독일 무용가들이 선호한 작품들의 주제이기도 하였다.
또한 독일 표현주의 무용가들은 인간이 실존하면서 예상치 않게 맞게 되는 주관적 복합성을 주제로 하였고 , 내용은 주로 어둡고 고민하는, 즉 실존하는 인간의 문제들이었는데, 이것은 바로 전쟁으로 인하여 황폐해진 독일의 현실을 그대로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초기 독일 표현주의 무용은 당시 다른 큰 줄기를 이루고 있었던 미국의 무용이 감정의 표현에 있어서 객관적이었던 반면에 주관적으로 감정을 표현하였다. 즉 미국 무용가들의 성향은 관찰하고 연기하고 논평하며 또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를 주로 지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반면, 독일 무용가들은 개개인의 성향에 의거한 사실적 감정의 경험으로써 표현하였던 것이다.
2) 후기의 표현주의
마리 비그만과 표현주의 무용이라는 훌륭한 전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현대무용은 2차대전 이후 파시즘의 유령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용가들은발 레에서 다시 그 도피처를 찾게되어 독일에서 표현주의 전통은 사라져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1989년 학생운동을 계기로 독일 무용계는 춤 양식의 재건을 도모하게 되었고, 다시 표현주의 전통으로 되돌아가 독일 현대무용을 재구축하는 움직임이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전위무대, 미국의 현대무용 그리고 발레의 제반 요소를 통합하게 되었는데, 탄츠 테아터(Tanz Theater)가 그 대안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탄츠 테아터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피나 바우쉬(Pina Bausch)는 에센 폴크방 예술대학과 미국 줄리어드음악원에서 공부한 뒤 1973년 부퍼탈 시립무용단의 예술감독 겸 안무가로 취임했으며, 연극과 춤의 경계를 넘나드는 ?탄츠테아터?라는 혁신적인 장르를 발전시킴으로써 20세기 최고의 무용가 반열에 올라섰다.
무용작품에서 연극적인 대사를 구사하고 무대장치도 추상성을 벗어나 일상용품들로 구성하는 ‘무용과 연극의 조화’가 바로 피나 바우쉬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의 주제는 일관되게 현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간에 접촉의 어려움과,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만남을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피나 바우쉬와 더불어 독일 현대무용의 20세게 후반을 이끌어 온 현대무용가는 수잔링케(Susan Linke)였다.
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녀는 쿠르트 요스가 세운 에센의 폴크방 학교에서 수학하고, 1970년부터 3년동안 피나 바우시가 예술감독으로 있던 폴크방 댄스 스튜디오에서 무용수로 활동했으며 이때 자신의 안무작을 선보여 서서히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상을 받았고 10년동안 폴크방 댄스 스튜디오를 이끌게 됐다.
`아름답기만한’ 춤을 거부하며 70년대부터 일상적 삶을 춤으로 끌어들여 보수적 무용계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그녀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춤 세계를 전쟁과 연관시켜 설명했다.
“독일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그만큼의 죄를 갖고 있다. 전쟁중 인간의 수많은 모순을 목격했고 그로 인해 아픔을 겪었고 반성도 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아름다움만을 표현하는 고전발레보다는 인간의 일상을 보여주는 현대무용이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믿게 됐다.”
– 현대무용의 거장: 이사도라 던컨
미국 태생의 이사도라 던컨은 현대무용의 개척자로 불린다. 187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음악 교사인 어머니로부터 음악적 기초 교육을 받았고 아울러 발레도 습득하였다. 그녀는 태어나면서 부터 자연을 사랑한 반항적 기질이 있었으며, 그래서 인공적인 기법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덩컨은 처음으로 시카고의 무대에 올랐을 때 토우 슈즈(발레 슈즈)도 던지고 타이즈도 입지 않은 채, 맨발에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발레를 했고, 기교 본위의 발레밖에 보지 못했던 관객의 조소를 받았다. 그녀는 몰이해한 조국에 실망하여 1900년에 유럽으로 건너갔다.
덩컨은 그 해 파리에서 그녀 나름의 독특한 새로운 무용을 발표, 그곳에서 처음으로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고, 각지에 그녀가 주장하는 ?자유댄스?를 발표․선전했으며, 독일에서는 가장 강력한 지지를 획득했다.
그녀가 일으킨 혁명은 발레에 대한 반항이요, 나아가 그 당시 남자와 여자들의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반기였다. 미국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이 시작되고 남자와 여자에게 균등한 기회를 요구하는 결의가 여성들 사이에서 번져가던 때, 이사도라는 독일의 신무용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독일 베를린 근처의 그뤼네발트에 무용학교를 설립한 것은 1904년이었다. 또한 1905년 러시아 방문 공연은 러시아 발레의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발레뤼스가 결성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의 무용에서의 자연주의란, 인공적인 기교 제일주의의 고전 발레에 대한 반발인 것이며, 또한 기성의 음악곡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그대로 무용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그녀는 기법이나 표현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을 주장하였고 무용 예술을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개방하여 대중의 손으로 옮기는 일을 개척하였다.
던컨은 그녀가 무용의 정수라고 믿은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단순성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녀의 창작 방법은 창조적인 선구자라면 누구나 취했어야 할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진실로 인간의 영혼을 육체의 움직임이라는 수단으로 성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무용을 추구한 것이다.
던컨의 표현은 때로는 너무 천진스러운 것이었지만 1930년대와 1960년대의 자유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활동적이고 주체성이 강한 여성이고, 여성임을 영광되게 한 인물이며 그러면서도 그녀의 일을 수행해 나가는 데에 타협을 몰랐던 여성의 표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2020년 6월 26일, 1176호 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