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들녘에 누렇게 익은 밀밭, 끝없는 벌판에 나즈막한 언덕, 간간이 보이는 숲속에 교회의 뾰족탑, 고색창연한 마을과 번갈아 나타나는 샛강, 프랑스가 아니면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들이다. 이런 풍경과 함께 서쪽으로 흐르는 강들 중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이 있다. 프랑스 역사를 배경으로 감추어진 왕실의 이야기를 실고 굽이굽이 흐르는 강. 프랑스 중부에서 남서쪽 북대서양으로 흐르는 르와르강 이다.
강변 지역은 오래전부터 프랑스의 곡창지대이며 프랑스의 정원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평야지역이다. 길이가 1000km가 넘는 르와르 강은 프랑스 중부지역의 평원을 길게 가로지르며 풍성한 전원 풍경을 선사해 준다.
프랑스의 다른 강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중세부터 자연 경관에 매료된 왕과 왕족들은 강 주변에 크고 화려한 성들을 짓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자랑하고 왕실의 애첩들과 사랑놀이에 빠지곤 하였다. 특히 중세 말 발루아 왕조부터 르네상스 후의 부르봉 왕조 시대까지 많은 왕들이 그곳에 크고 작은 성들을 지어왔다. 르와르 강 일대에는 지금도 고성들이 산재해 있고 현재 남아 있는 고성들도 200 여 채가 넘는다.
르와르 강변은 파리시대 이전의 프랑스의 정치 중심지
르와르 강변은 1600년대 들어와 왕궁이 파리 근교로 이전될 때까지 명실상부하게 프랑스 왕과 왕족들의 거주지였고 정치 중심지였다. 지금도 볼만한 성들이 80곳이 넘고 그 중 몇몇은 일류 관광지로 소문나 일 년 내내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도 있다. 과연 어떤 성들이 역사의 현장을 잘 간직하고 찾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예를 들면 1600년대 슈베르니 백작의 소유로서 좌우 대칭의 균형미가 뛰어난 슈베르니성(Cheverny)이 좋은 예이며 호수에 비친 성의 모습이 대단히 매력적인 아제 르 리도성(Azay le Rideau)도 빼놓을 수 없다. 또 샤를 8세가 세우고 프랑스와 1세 시절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최후로 숨을 거둔 곳으로 유명한 앙브아즈성(Amboise), 쟌 다르크가 샤를 7세에게 왕위를 계승하라는 신의 계시를 전한 쉬농성(Chinon)도 떠 올릴 수 있으며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앙리3세가 정적 기즈공을 암살했던 블루와성(Blois),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고 궁중 여인들의 소유권 분쟁의 대상이었던 쉬농소성(Chenonceau)등도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수도 없이 많은 성들이 모여 있는 르와르 강변 근교에서 그중 단 하나의 성을 선택해서 보아야 한다면 단연코 화려하면서도 장엄하기도 한 샹보르 성(Chambord)이다. 르네상스 시절에 문화와 예술후원자였고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양식을 대단히 사랑했던 프랑스와 1세(재위1515-1547)의 평생의 역작이었던 샹보르 성. 프랑스 고성 중 가장 잘 알려진 샹보르 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샹보르 성은 프랑스 왕과 이탈리아 건축가와의 합작
프랑스와 1세는 역사에 남는 예술 후원자였다. 그런 프랑스와 1세의 최대의 관심 분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이었다. 이탈리아 미술과 건축양식에 너무도 매료된 나머지 이탈리아 화가와 건축가들을 초빙해 작품제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던 프랑스와1세에게 당시 북이탈리아 최고의 화가이면서 건축가요 과학자이기도 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선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프랑스와 1세는 1515년 루이 12세(재위1498-1515)가 죽은 직후 왕위에 오른다. 이탈리아 문화에 대해 늘 동경해오던 프랑스와 1세는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북이탈리아를 침공해 밀라노를 점령한다. 그러나 점령군의 왕이었던 프랑스와 1세는 점령지의 문화에 매료되어 이태리의 건축과 예술에 감탄했고 많은 예술품들에서 눈을 땔 줄 몰랐다. 마치 1500여 년 전 그리스를 점령했던 로마 병사들이 이와 같았으리라.
왕은 프랑스로 귀국하면서 전리품으로 많은 예술품들을 챙겼다. 그러면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었다. 돌아가면서 이탈리아 당대 최고의 화가와 건축가들을 초빙해간다. 이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포함되었다.
초빙 되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미 64세의 고령이었다. 노년의 나이를 생각하면 고향 떠나 국경 넘은 긴 여행은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제자와 함께 알프스를 넘는다. 일생 동안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하는 역마살의 팔자도 작용했겠지만 또 끊임없는 호기심과 탐구정신이 이 마지막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으리라 추측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 프랑스 여행길에 무슨 까닭인지 평소에 아끼던 그림 3점을 함께 운반했다. 훗날 프랑스 땅에서 다빈치가 사망한 후 이때 가져간 그림은 반환되지 않는다. 그런데 반환되지 않은 그림 3점 중에는 후대 세상에서 제일 유명해진 그림인 <모나리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표작인 <모나리자>가 프랑스로 넘어간 것은 이때의 일이다.
아무튼 프랑스 왕궁이 밀집한 르와르 강변에 도착한 레오나르드 다 빈치는 프랑스 왕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3년간을 앙브와즈 성에서 보낸다. 그때 그 시절 프랑스와 1세는 자신의 통치를 빛낼 수 있는 새로운 궁전을 원했다. 북 유럽 특유의 건축술을 보여주면서도 이태리의 건축을 첨가해야 했다. 밀라노시절 스포르차가문을 위해 건축과 성의 축조 술에 참여한 적이 있는 다빈치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고안하면서 왕의 기대에 맞는 새로운 궁전 건축에 참여한다.
3년간을 프랑스와 1세와 함께 앙부와즈 성에서 지내면서 천부적 재능을 보인다. 샹보르성은 이때 설계되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이탈리아궁을 능가하는 프랑스궁을 구상하면서 고령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최후를 준비했다.
다음호에 계속해서 샹보르 성에 대해 알아보겠다.
1182호 20-21면, 2020년 8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