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신독일영화 (Neuer Deutscher Film) ② 라이너 베르너 마리아 파스빈더(Rainer Werner Maria Fassbinder)

라이너 베르너 마리아 파스빈더(Rainer Werner Maria Fassbinder)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독일영화의 전설이다.

1982년 37세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그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많은 영화를 찍었으며 ‘신독일영화’ 감독들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파스빈더는 40여편에 이르는 다작으로 유명하며 연극연출, 텔레비전 영화, 라디오에 이르기까지 매체를 가리지 않고 일했다.

파스빈더는 ‘신독일영화’ 세대의 다른 감독들처럼 나치즘에 대한 반성과 산업화한 독일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것이 새로운 독일영화의 나아갈 길이라고 믿었다.

파스빈더는 1945년 5월 31일 바이에른의 바드 뵈리스호펜(Bad Wörishofen)에서 태어났다. 짧은 생애동안 그는 43편의 영화(2개의 단편과 15시간 반짜리 ‘베를린 알렉산더광장’ 포함)를 찍었고 영화, 연극배우이자 작가, 카메라맨, 작곡, 디자인, 편집, 프로듀서, 극장 경영 등 다양한 직책과 역할을 맡았다. 파스빈더가 찍은 영화의 수는 가히 전설적인데, 그는 평균 100일마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감독에 데뷔한 파스빈더는 가죽점퍼에 지저분한 청바지, 늘 찌푸린 얼굴, 그리고 동성애자로서 술과 마약, 그리고 많은 연인들과의 스캔들로 언제나 반항적인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춰졌다.

파스빈더는 전후 독일 사회에 잔존해 있는 파시즘과, 산업화와 함께 새롭게 야기된 소외에 주목하면서 다양한 형식 안에 자기 시각을 녹여 영화화했다. 파스빈더 스스로도 “나는 모든 방향으로 돌진한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 일반 영화 관객과 감독들에게는 그의 작품들은 생소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파스빈더는 1969년 첫 장편영화를 만들었으며, 총 41편의 장편영화와 상당수의 연극작품을 만든 다작 예술가로, 주로 중산층의 가치관과 관습을 비판하고 있다.

파스빈더는 자신이 속해 있던 독일 시민사회와 더 나아가 인류의 한계를 가차없이 공격했다. 그의 영화들은 사랑과 자유에 대한 절박한 갈망 그리고 사회와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그런 갈망을 좌절시키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파스빈더 감독과는 달리 대부분 순진한 경향을 보이는데, 영화의 결말에 가서는 자신들의 낭만적 환상의 어리석음을 거칠게, 때로는 잔혹한 방식으로 깨우친 후 사회를 위협하기도 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ngst essen Seele auf, 1974>에서는 젊은 아랍 노동자와 외로운 백인 과부를 통해 개개인의 이기주의와 독일사회의 인종차별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폭스와 그의 친구들 Faustrecht der Freiheit, 1975>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동성애자가 부르주아 청년에게 이용당한 후 끔찍한 죽음을 당하는 이야기로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하며, 순진한 노동계급의 동성애자를 파괴시킨다.

그는 <카젤마허 Katzelmacher 1969>, <저주의 신들 Götter der Pest, 1970>, <미국인 병사 Der Amerikanische Soldat, 1970> 등의 갱영화를 찍기도 했다. ‘카젤마허’란 바바리아어로서 지중해 연안 지방에서 독일로 이민 온 노동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주인공으로 세운 외국인 노동자들을 통해 독일 사회를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페트라 폰 칸트의 비통한 눈물 Die bitteren Tränen der Petra von Kant 1972>은 파스빈더의 영화 중 가장 연극적이고 양식화된 영화로 사랑과 그 사랑을 이용하는 사람들, 소유와 강박관념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만이라도 해줘 Ich will doch nur, daß ihr mich liebt 1976>는 어려서부터 매정하고 이기적인 부모에게 사랑 받기 위해 선물을 하는 건설 노동자 페터의 이야기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한 강렬한 요구로 인해 인생의 모든 사랑을 선물로 얻으려 하나 결국 불행해진다. 파스빈더가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을 탐색한 개인적인 고백이 아니냐는 평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50년대 ‘경제적 기적’에 이르기까지 독일 역사를 반영하는 풍자적인 결혼 풍속도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Die Ehe der Maria Braun 1979>, 푸른 옷의 천사에 관한 전설을 재해석한 〈롤라 Lola 1981>, 독일 여배우 지빌레 슈미츠의 삶을 그린 〈베로니카 보스의 갈망 Die Sehnsucht der Veronika Voss 1982> 등 그의 걸작 3부작은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1980년에는 알프레드 되블린(Alfred Doeblin)의 소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Berlin Alexanderplatz』을 텔레비전 극으로 각색하기도 했다.

파스빈더는 기존의 질서(그 자신이 속해 있기도 했지만)에 대한 비판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진보와 보수 모두를 경계했었고 종종 여성 차별주의자, 매국노 심지어는 반유태주의자로 비난받기도 했었다.

파스빈더의 초기작품들에서는 외로움이 주제로 부각되어 있는데, 사랑의 부재(不在)에 의한 인간사회의 외로움,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두려움과 폭력이 그려져 있다.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외로움의 극복은 오로지 폭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써 파스빈더는 자신의 유년기 시절을 함께 했던 헐리우드 갱영화를 의식적으로 모방하며, 연극적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인간사회의 외로움을 다뤘던 파스빈더는 독일문학과 역사를 영화화 하며 그의 중기 작품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의 영화들에서는 그의 모국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읽을 수 있다. 다른 오버하우젠 2세대들과 Volker Schloendorff와 Edgar Reitz와 마찬가지로 파스빈더도 문학작품의 영화화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그가 선택한 독일운학은 대부분 여성문학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그에게 있어 여성은 “억압받는 자”이다. 하지만 “억압하는 자” 역시 남성이 아닌 여성 그들이다. 파스빈더의 “독일역사 새로쓰기”는 이러한 여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전후시대의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역사쓰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동성애에 관한 영화들이 그의 작품을 주를 이루게 되는데, 파스빈더의 여성에 관한 시각은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파스빈더의 대부분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Franz란 인물은 그가 열일곱살때 읽어보고 본인이 동성연애자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됐다는 소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주인공에서 따왔으며, 파스빈더는 이 인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영화 속에 반영하고 있다.

파스빈더의 죽음으로 ‘신독일영화’는 막을 내렸다고 할 만큼 전후 독일 영화의 상징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파스빈더는 ‘인간의 감정’을 위한, 그리고 ‘감정의 인간‘을 위한 영화라는 새로운 주제를 펼쳐보였다.

1199호 20면, 2020년 1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