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15)

프랑크푸르트(Frankfurt): 1000년 제국의 도시, 근대 독일의 탄생지

오늘날 프랑크푸르트는 뉴욕의 맨해튼을 빗대어 “Mainhattan”, 도는 금융의 도시라는 의미로 “Bankfurt”라 불릴 정도로 독일 및 유럽 금융과 경제의 중심지이다. 또한 유럽의 관문이자, 유럽 전역을 연결하는 허브 도시로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가장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뒤돌아보면, 프랑크푸르트는 그 많던 제후국의 중심지도, 영주나 주교의 거주지도 아닌 소규모 자치시에 불과했다. 그런 프랑크푸르트가 어떻게 근대 독일의 탄생지가 될 수 있었을까

신성로마황제의 대관식이 열린 프랑크푸르트 돔과 1848년 국민의회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번 역사산책, 프랑크푸르트 편에서는 1000년 제국의 도시로서의 프랑크푸르트, 수많은 소 제후국으로 나뉘었던 제후국 연합체가 어떻게 독일이라는 단일 민족국가로 거듭나게 되는지를 살펴보는 근대독일의 탄생지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괴테를 배출한 문화도시로서의 프랑크푸르트의 과거와 현재를 현장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왜 프랑크푸르트인가?

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인하여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프랑크푸르트는 전후 폐허의 잔해 위에서 도시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재건을 위한 프랑크푸르트 시의 노력은 단순한 물리적 복구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시는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과거의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중심지로서의 프랑크푸르트가 가졌던 정체성과 역사적 기억까지 되살리려는 노력을 함께 하였던 것이다. 이번 역사산책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시의 이러한 노력의 과정도 함게 살펴보도록 한다.

– 1000년 제국도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선출과 즉위식이 열리다

프랑크푸르트 시청

1356년 신성로마제국황제 칼 4세(Karl IV)는 금인칙서(Goldene Bulle)를 공포한다.

금인칙서(金印勅書, 라틴어: bulla aurea)는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군주가 수여한 문서로서, 금인헌장(金印憲章), 황금문서(黃金文書)라고 부르기도 한다. 금인칙서는 문서에 인쇄된 군주의 인장이 금색이었기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4세(Karl IV)에 의해 공포된 금인칙서는 황제 선출과 대관의 방법을 규정하고 있는 문서로서 프랑크푸르트를 황제선출 장소임을 공식적으로 지정하였다.

탈 4세의 금인칙서에 따르면, 신성로마황제가 사망하게 되면 마인츠 대주교가 4주 이내에 자신을 포함해서 3명의 대주교(트리어, 쾰른, 마인츠)와 보헤미아 왕, 팔츠백작, 작센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작 등 4명의 세속 선제후, 7명으로 구성된 “황제 선출위원회”를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해야만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로서 프랑크푸르트는 신성로마황제의 선출과 대관식을 거행하는 역사적 장소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부터 신성로마황제 선출은 프랑크푸르트의 돔에서 이루어졌으며, 총 52명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가운데 33명의 황제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출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대관식은 금인칙서 공포 후 20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인 156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게 되는데, 프랑크푸르트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최초의 황제는 막시밀리안 2세(Maximillian II)였으며, 그때부터 대부분의 황제는 이러한 관례를 따라서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의 선출과 대관 의식을 동시에 거행하였다.

이로서 1356년 신성로마제국의 법에 의해서 황제선출 도시로서의 공식적 지위를 보장받았던 프랑크푸르트는 그때부터 1806년 나폴레옹의 의해서 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 St. Paulskirche: 근대 독일의 탄생지

St. Paulskirche

나폴레옹의 패배후 1815년 오스트리아 주도로 유럽의 질서를 프랑스 대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는 ‘빈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결성된 ‘빈 체제’는 옛 신성로마제국 구성국들인 38개 개별 국가(자치 시 포함)를 독일 연방(Deutsche Bund)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출범시킨다. 독일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어 사용국가들이 마치 신성로마제국 시절처럼 느슨하게 묶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에 눈을 뜬 독일인(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이런 미완성 형태의 국가를 부정하며, 통일국가의 수립을 요구하는 외침이 점차 커져간다. 그러나 강력한 실권을 쥔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은 이런 외침을 외면하였고, 그 와중에 프랑스에서는 1848년 2월 혁명이 성공하여 왕정이 무너지고 다시금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고, 독일이들도 거리로 뛰어나오게 된다. 이것이 독일의 3월 혁명이다.

3월 혁명으로 인해 ‘빈 체제’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는 사퇴하고, 베를린과 비엔나에서는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독일 연방은 구성국마다 국민 선거로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연방의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인구수에 비례하여 선출된 의원의 수는 총 585명. 교수, 판사, 변호사 등 지식인층 중산층 위주로 선출되었다. 지역 대표가 모두 모인 국민의회가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의 St. Paulskirche에서 열리게 된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사 뢰머에서 먼저 의장단을 선출한 뒤 축포 소리와 함께 St.Paulskirche) 입장하며 역사적인 프랑크푸르트트 국민의회가 시작된 것이다.

여런 논의 끝에 1년이 지난 1849년 5월, 헌법이 힘들게 채택되었다. 프랑크푸르트국민의회에서의 중요한 두 결정으로는 소독일주의와 입헌군주국 채택이었다.

통일 국가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한정한다, 그러므로 독일어 비사용 지역의 비중이 큰 오스트리아는 통일 국가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른바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소독일주의에 입각하여 독일인의 통일 국가의 틀을 정하였다. 그리고 프로이센 국왕을 통일국의 황제로 추대하며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제 추대를 거절하였다. 결국 입헌군주제는 좌절되고, 가장 중요한 권력구조조차 정하지 못하자 국민의회는 급속도로 와해되고 만다.

그러나 22년뒤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성립된 독일제국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소독일로, 그리고 입헌국주제 하에서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독일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헌법은 이렇듯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한 독일제국의 창건 시에 중요하게 반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공화국을 실험한 바이마르 헌법과 서독 및 현재 독일 기본법의 모범이 되었다.

결국 1848년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좌충우돌 밀어붙인 것처럼 보였던 국민의회 헌법은 실제로 근대 독일 탄생의 결실을 맺은 셈이다.

문화도시로서의 프랑크푸르트

1749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한 괴테(Johann Wolfgang Goethe)의 이름과 괴테하우스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문화적 상징 장소이며, 이는 문화도시로서의 프랑크푸르트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가 문화도시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단지 괴테의 도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프랑크푸르트는 경제적인 발전 외에도 오래전부터 문화적 생활과 사회적 생활에 있어서도 활력을 자랑하는 유럽의 도시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각 시대의 수준 높은 연극들이 상연되었으며, 쉴러의 극 “음모와 사랑(Kabale und Liebe)”이 1784년 최초로 무대에서 상연된 곳이 프랑크푸르트 국립극장이었다. 또한 1763년 8월 어린 모차르트는 아버지와 함께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하여 4일 동안 연주를 하였으며 1790년 34세의 모차르트도 프랑크푸르트에서 콘서트를 개최 하였다. 1880년 완공된 알테 오퍼(Alte Oper)는 프랑크푸르트가 자랑하는 오페라 하우스로서 1889년 그곳에서 말러는 자신의 교향곡 1번과 2번을 지휘한 바 있다.

1831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퍼지자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1860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았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프랑크푸르트의 매력을 다음과 같이 메모하였다.

“프랑크푸르트의 이점들 – 건강에 좋은 날씨, 멋진 경치, 대도시의 편의시설, 자연사박물관, 훌륭한 연극들, 오페라, 콘서트, 훌륭한 커피하우스, 나쁘지 않은 물, 솅켄베르크 도서관…….” 위대한 철학자가 남긴 프랑크푸르트에 대한 기억은 문화적 도시로서의 프랑크푸르트의 일면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프랑크푸르트는 40여개의 박물관/미술관, 20여개의 극장들을 통해 문화도시로서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마인강변에 자리잡은 박물관 강변거리(Museumsufer)는 프랑크푸르트를 대표하는 문화거리이다.

박물관 강변거리는 동서로 흐르는 마인강의 좌편 즉 남쪽 강변의 Eisernen Steg 다리에서 Frieden다리 (Friedensbrücke)까지 이고 이 마인강을 끼고 남쪽에는 9개, 북쪽(뢰머 광장쪽)에는 6개 총 15개의 박물관들이 있다.

1977년 시작된 “박물관 거리 조성” 프로젝트는 프랑크푸르트를 문화의 도시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20여년에 걸쳐 기존 박물관들을 확장하고, 원래 별장들이 많던 이 지역에 새로운 박물관을 건축하고, 거리를 정비하면서 박물관 거리가 만들어졌고 프랑크푸르트는 문화의 도시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금융중심지 프랑크푸르트

현재 프랑크푸르트는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서 그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중세시대부터 자치 시의 특권을 바탕으로 많은 박람회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고, 그를 통한 교역의 발전 등, 중세부터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독일 최초의 증권시장도 프랑크푸르트에 세워졌다.

1585년 9월 9일 프랑크푸르트 상인 회의에서 처음으로 동일한 환율을 설정했는데 이 회의는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Börse)의 탄생을 의미하게 되고, 이후 프랑크푸르트는 증권거래소의 역사는 1585년을 그 시작으로 삼는다.

증권거래소 역할을 하는 이 회의장소는 1694년 Römerberg에서 Liebfrauenberg의 “Großer Braunfels”건물로 이전되고, 1625년에 는 12 가지 유형의 화폐에 대한 평균 환율을 나열한 최초의 공식 환율표가 공시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프랑크푸르트 환율표는 1721 년부터의 환율표를 확인할 수 있다. 1682년에는 최초의 증권 ​​거래소 규정이 발표되었고, 초창기에는 외한과 어음 등이 취급되었다.

금융중심지로서의 프랑크푸르트를 설명할 때 로스차일드(Rothschild)가문을 빼어놓을 수 없다. 174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는 유럽의 왕과 귀족들의 신용과 예금을 관리하였으며, 그의 은행은 왕실과 귀족들의 명성과 권위를 바탕으로 굳건하게 그 세를 불려나갔다. 재산은 주식, 채권, 부채와 같은 형식으로 전 세계를 순환하였고, 폭력과 무력으로부터 안전한 은행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신용을 쌓았다.

이후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5명의 아들들을 유럽 각지(프랑크푸르트, 빈, 런던, 나폴리, 파리)로 파견하여 사업 범위를 확장해나가며 로스차일드 가문의 금융 제국을 형성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에 그려져 있는 ‘5개의 화살을 쥐고 있는 주먹’은 바로 이 5명의 아들들을 상징적으로 그린 것이다. 이렇듯 프랑크푸르트는 세계 금융제국을 형성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고향이기도 하다.

1208호 20면, 2021년 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