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47)
20세기의 지휘자(7)

문화사업단에서는 ‘20세기의 지휘자’를 주제로 8명의 지휘자를 선정하여 그들의 생에와 음악세계를 살펴보도록 한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Wilhelm Furtwangler)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카라얀 이전 20세기를 빛낸 또 다른 지휘자로서 이탈리아의 토스카니니와 함께 20세기 초중반을 대표하는 지휘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886년 1월 25일 베를린에서 베를린 대학 고고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난 푸르트뱅글러는 스승인 실링스(Max von Schillings)의 후원으로 1905년부터 브레슬라우, 뮌헨 지역에서 견습 지휘자로 지휘를 시작했다.

20세가 되던 1906년에는 뮌헨의 카임관현악단을 지휘하면서 마침내 정식 지휘자로 데뷔하게 되는데, 그가 택한 데뷔곡이 브루크너의 9번 교향곡이라는 점은 젊은 푸르트뱅글러의 높은 도전의식을 시사해준다.

젊은 지휘자의 이름은 빠르게 알려지게 되고 뤼벡(Lübeck), 취리히(Zürich), 그리고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등지의 오페라 무대에서 객원지휘에 나서게 되는데, 젊은 시절 그는 주로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경험을 많이 쌓게 된다. 25세가 되던 1911년에는 아벤트로트 (Hermann Abendroth, 1883-1956)의 천거로 뤼벡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경력의 중요한 출발은 1915년 29세의 나이에 보단스키 (Artur Bodansky)에 이어 만하임 (Mannheim) 오페라와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하고부터다. 만하임에서 있은 9월의 데뷔 공연은 베버의 “마탄의 사수”로 시작되었으며 오케스트라와의 첫 콘서트에서는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지휘한다. 만하임에서의 푸르트뱅글러는 지휘자로서의 주관을 확립해가면서 비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1918년부터 2년간 빈의 톤퀸스틀러 (Tonkunstler) 오케스트라에서 정기적으로 지휘를 하기도 한다. 1919년 만하임을 떠날 즈음에는 그의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급속히 높아져서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지휘자 자리를 맡게되고 이듬해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이어 상임 지휘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베를린 필과는 이미 1917년 말에 처음 객원지휘한 적이 있었는데 5년후인 1922년 1월 23일에 당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였던 전설적인 니키쉬 (Artur Nikisch)가 사망하자, 푸르트뱅글러는 이 거장의 서거를 추모하는 그해 2월 9일의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과 브람스의 “4개의 엄숙한 노래”를 베를린 필과 연주하게 된다. 이 공연은 너무도 성공적이어서 곧 베를린 필은 만장일치로 후임 지휘자에 푸르트뱅글러를 임명하게 된다. 곧 니키쉬의 유언에 따라 니키쉬가 맡고 있던 또 하나의 오케스트라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자리도 푸르트뱅글러가 맡게 된다. 그의 나이 36세때였다.

독일내의 가장 중요한 두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된 푸르트뱅글러는 이후 그의 명성이 전 유럽과 미국에 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31년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면서 바이로이트 무대에 최초로 서게 되며, 1933년에는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의 총감독이 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성공가도에는 바로 그해 히틀러의 나치가 독일을 통치하게 되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당시 많은 유태계 음악가들이 독일로부터 추방되자 이를 용납할 수 없는 야만적인 행위임을 안 푸르트뱅글러는 모든 자리를 사임하고 오직 베를린 필의 연주에만 임한다.

그는 베를린 필 내의 유태계 혈통을 지닌 단원들을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했으며 그의 이런 노력은 어느정도 효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예술가가 정치가를 당할 수는 없었다.

푸르트뱅글러는 순수 아리아인이었기에 히틀러는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1933년 7월에 프로이센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해버린다. 그가 카라얀과 달리 나치 당원이 아니었음에도 종전후 전범으로 몰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가 다시 재개된다. 푸르트뱅글러가 그 개막 공연에서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연주는 아직까지도 불후의 명연으로 기억되고 있다. 푸르트뱅글러는 종전후 첼리비다케에 넘겨 주었던 베를린 필의 상임자리에 1952년 베를린 필 창립 70주년 되는 해에 다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66세의 푸르트뱅글러는 점점 몸이 세약해져가고 있었다. 폐렴이 도져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고 항생제의 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갈수록 몸이 수척해져만 갔던 것이다. 1953년에는 빈 필과의 연주 중 실신상태에 이르러 잠시 연주활동을 중단해야만 하기도 했다.

결국 1954년 9월 19일 베토벤의 교향곡 1번과 자작 교향곡 2번의 연주를 끝으로 더 이상 지휘대에 설 수 없었다. 푸르트뱅글러는 요양을 위해 바덴바덴으로 옮겨 갔으나 결국 1954년 11월 30일 68세의 이른 나이에 운명한다.

푸르트뱅글러의 음악

악보의 충실한 재현을 넘어서서 지휘자의 해석에 의해 음악을 재창조해내는 작업을 그 누구보다 훌륭히 해낸 지휘자가 푸르트뱅글러였다.

그는 단원들의 생리를 너무도 잘 이해했으며 인간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단원 각자의 자신감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원들은 그를 천재적인 존재로 존경했으며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한 몸이 되어 콘서트 홀을 뜨거운 열기로 넘쳐흐르게 만들어갔다.

그의 개성은 무엇보다도 베토벤, 브람스와 같은 독일계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연주할 때 두드러진다.

푸르트뱅글러는 베토벤을 연주할 때 베토벤이 자신의 교향곡을 지휘할 때처럼 지극히 과장된 클라이막스와 속삼임과 같은 피아니시모를 요구했다. 푸르트뱅글러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지휘자 칼 뵘은 “이제 누가 브람스 교향곡의 파사칼리아를, 누가 브루크너의 아다지오를, 누가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할 것인가”라고 말해서 그의 음악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해주었다. 푸르트뱅글러의 예술에 베토벤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 어느 지휘자들보다 많다. 그가 연주한 베토벤의 홀 수번 교향곡들의 완성도에 근접할만한 연주들을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이다.

1216호 23면, 2021년 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