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48)
20세기의 지휘자(8)

문화사업단에서는 ‘20세기의 지휘자’를 주제로 8명의 지휘자를 선정하여 그들의 생에와 음악세계를 살펴보도록 한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

역사상 최고의 지휘자 중 한명으로 꼽히는 토스카니니는 1867년에 이탈리아의 파르마에서 출생하여 1957년에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20세기 지휘사에 거대한 양대 산맥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며 그에 관한 무수한 일화들은 이제는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과 남다른 기억력을 나타냈는데, 1876 년에서 1885 년까지 9 년 동안 파르마 왕립음악원에서 배웠다. 그는 첼로, 피아노, 작곡을 배웠는데 그 동안 틈만 있으면 묵묵히 악보 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러한 공부의 성과가 졸업한 이듬해인 19세 때 전설적인 데뷔로서 나타났다.

1886년 6월 30일, 이탈리아 로시 오페라단과 오케스트라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로에서 <아이다, Aida>를 공연했다. 막이 오르기 직전에 지휘자와 악단 사이에 언쟁이 일어났고 화가 난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떠나 버렸다. 할 수 없이 부지휘자가 대신해 보려 했으나 관중들의 야유 속에서 물러나야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극장측에게 몇몇 단원이 말했다.

“혹시 가능하다면 우리 젊은 첼리스트에게 지휘를 맡겨보는 게 어떨까요?

저 친구는 악보란 악보는 죄다 외우고 있거든요.”

19살의 젊은 첼리스트가 졸지에 지휘대에 서게 되었다. 관중들은 이번에도 야유나 퍼부어야겠다고 생각 하면서 다시 객석에 앉았다. 그런데 이 왜소한 첼리스트는 보면대에 놓인 악보를 걷어버리고서 거침없이 지휘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중들은 넋을 잃어갔고 결국 1막이 끝나자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거장 중의 거장, 토스카니니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 이후부터 토스카니니는 본격적인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1892년에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탈리아 초연을 담당하였고 같은해에 레온카발로의 ‘팔리앗치’를, 1896년에 푸치니의 ‘라보엠’을 세계 초연하는 등 오페라 지휘자로서 확고부동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또한 1898년에 메트로폴리탄에서 ‘아이다’를 지휘하고 1차 대전이 끝난 후 1920년에 라 스칼라 가극장 관현악단을 이끌고 뉴욕에서 연주회를 가지고 1926년에 뉴욕 필하모니의 제1회 정기연주회를 지휘하고 1928년에 상임지휘자가 되어 1936년까지 재임하는 등 미국에서도 화려한 연주경력을 쌓아나갔다. 1930년에는 바이로이트 공연에 초청받아 바그너의 악극을 지휘하기도 하여 이탈리아 지휘자들이 경원시하였던 바그너의 음악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피해 미국에 정착한 토스카니니는 이후 여생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수많은 레코딩을 남겼다. 1936년에 70세로 뉴욕 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를 그만둘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그는 은퇴하였으며 그의 시대도 끝났다고 생각하였으나 바로 그해 성탄절에 그를 위해 창립된 NBC 교향악단의 제 1회 정기연주회를 지휘하면서 무려 17년의 세월을 더 활약하였으니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정열에는 그 누구라도 경외감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지휘하는 모든 악곡의 원전을 면밀히 검토하여, 자칫하면 19 세기 후반의 명인적(名人的)인 지휘자들이 작곡가의 지시를 자기들 마음대로 고쳐서 연주하는 태도에 철퇴를 가한 인물이었다.

작곡가가 악보를 통하여 알리고 싶었던 것을 엄격히 재현하려고 했던 지휘자였다.

그리하여 하나의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휘하는 태도의 문을 열었다.

따라서 20 세기 초엽에 등단한 지휘자로서 많든 적든간에 토스카니니로부터 배우지 않은 지휘자는 거의 드물었다.

미국의 작곡가인 아론 코플란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토스카니니에게 강조되는 것은 언제나 멜로디 선(line)과 전체의 구성이며 결코 세부나 특정 소절을 분리하여 강조하지 않는다. 그의 연주를 통해 음악은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나가게 되며 그러한 살아있는 음악을 듣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행운이다.”

토스카니니는 악보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으며 작품의 스타일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개개의 작품이 지니는 개성을 최대한 살리는 연주를 하였는데, 이탈리아 작품에서는 그 선율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듯이 최대한 살리면서 깔끔하고 정돈된 연주를 하고 독일 작품에서는 선율과 함께 리듬과 형식미를 조화시킨 웅대한 음의 건축물을 구축하였다.

토스카니니의 연주는 강인한 리듬과 굵은 골격을 바탕으로 장대한 스케일의 음악이 당당히 울려펴지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실로 그는 동시대의 지휘자들 중에서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마술사와 같은 존재였으며 그와 함께 연주하였던 단원들은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들어 도취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였다.

그의 지휘는 단원들로 하여금 세부적인 데까지 공부하도록 만들고 섬세하면서도 엄격한 리허설을 반복한 덕분에 오케스트라와 성악진의 음악적 기량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불같은 성미 때문에 많은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토스카니니의 데뷔 레코딩은 1920년, 그의 나이 쉰셋에 시작되었다.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미국 순회 연주 도중이었다.

이로부터 토스카니니는 뉴욕 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BBC 심포니, NBC 교향악단 등과 함께 레코딩을 남겼다. 토스카니니의 레코딩은 대부분 RCA 레이블에 있다.

RCA 는1992년 초 토스카니니의 125주년을 기념하여 82개의 디지털 리마스터링 된 컴팩트 디스크로 <토스카니니 컬렉션>을 재발매했다.

총 85시간 분량의 방대한 이 전집에는 53개의 교향곡, 53개의 서곡, 7개의 오페라 전곡, 9개의 협주곡, 열 개의 무곡, 14개의 모음곡 등이 포함되어 있다.

1217호 23면, 2021년 5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