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59)

한국의 불교미술(6, 마지막회)

조선시대 탑

천여 년간 민족신앙의 정신적 지주로 성장해 온 불교는 고려시대 말기에 들어 국가의 무분별한비호와 불교집단세력의 비대정상적인 성장으로 오히려 사회적인 부패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를 척결하기 위하여 일어섰던 신흥사대부들은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를 건국하면서 유학을 실천이념으로 표방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민족의 정소도 서서히 유교적 분위기로 탈바꿈하게 되고 불교는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에 의하여 신랄한 비판과 거센 억압을 당하였으며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불탑을 포함한 불교미술도 간혹 몇몇 왕들의 후원으로 약간의 조형 활동이 지속된 적은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조선시대의 불탑건립은 왕실의 비호가 있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으며 그나마도 조선중기 이후로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목 탑

조선시대에 조성된 불탑 중에서 목탑으로는 태조의 후비의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정릉 부근에 홍천사를 짓고 5층의 사리각을 세운 것이 유일한 기록이다. 속리산 법주사팔상전, 전남 화순의 쌍봉사대웅전 등이 조선시대의 목탑으로 전하여져 왔는데, 쌍봉사대웅전은 1984년에 소실되고 지금은 법주사팔상전만이 유일한 조선시대 목탑인 동시에 우리나라의 단 하나뿐인 목탑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법주사팔상전도 여러번의 개축과정을 통하여 조선시대에 이른 것이며, 그 시초는 지금도 남아 있는 초창기의 기단과 함께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구나 이 팔상전은 탑신의 처마를 받치는 포의 구성이 윗층으로 오를수록 중첩이 심하여 익산 미륵사지석탑의 처마조성기법과 상통하고 있어 그 계보가 주목 되고 있다.

석 탑

조선시대의 석탑은 새로운 양식이 성립됨이 없이 전대의 작품을 모방하는 차원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세조13년(1467)에 세워진 서울 탑골공원(일명 파고다 공원)의 원각사지십층석탑은 고려 말기의 경천사지십층석탑을 본뜬 것이며, 경상북도 함양의 지리산에 있는 벽송사삼충석탑은 신라의 일반형석탑과 형식상에서 조금도 차이가 없다

신륵사다층석탑은 기단부의 조형은 경천사지십층석탑에서 착상의 실마리를 얻고 탑신부는 고려석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칠층석탑은 각층마다 탑신괴임대를 삽입하는 기법이 고려시대의 석탑인 강릉 신복사지삼층석탑을 모방하고 있다.

경기도 양주의 묘적사칠층석탑과 수종사오층석탑은 만듬새가 매우 비슷하여 한 장인으로부터 두 탑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원형은 고려시대의 보현사팔각십삼층석탑과 같은 다각다층석탑에 남아 있다. 이밖에 격북 달성의 용연사석조계단도 역시 고려시대 이전부터 조성되엇던 계단형사리탑의 형식을 모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석탑은 독창적인 양식을 창출하지 못하고 전대석탑의 한 부류로서의 모방에 머무르다가 끝을 맺고 말았다.

불교에서는 세가지의 성스러운 보배가 있으니 바로 불, 법, 승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의 삼보는 모든 불교도들로 하여금 숭배의 대상이 되어 부처를 위해서는 탑과 불상을 만들어 예배를 드리고, 가르침에 대해서는 이를 수많은 경전으로 받들어 세상에 유포하며, 스님은 불법을 전도하고 민생을 교화하는 전도자로서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승탑

끝으로 시대와 무관하게 승려를 기리는 탑 즉 승탑에 대해 알아본다.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승려들이 백성의 스승인 국사의 칭호와 국왕의 스승인 왕사의 칭호를 받았고, 이들은 세상의 교화는 물론 불법의 학문적 탐구에도 정진하여 외국에까지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덕망높은 스님이 일생을 마치게되면 평소에 추종하던 신도들에 의하여 묘탑이 세워지고 묘탑근처에는 스님의 업적과 덕망을 칭송하고 명복을 비는 탑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대체로 이러한 승탑과 탑비는 왕명으로 묘탑의 칭호가 붙여지면 비문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가 글을 짓고 명필가에 의하여 글씨로 옮겨져 비석에 새겨진다.

이같이 지극한 정성으로 세워진 승탑과 탑비는 건조물이면서도 온갖장식무늬를 새겨넣어 격조높은 조형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어 각기 우리나라 석조미술의 진면목을 이루게 되었다. 더구나 승탑과 탑비는그 주인공을 알 수 있고 건립연대를 파악할 수있으며, 탑비에 새겨진 비문은 역사적인 기록인 동시에 문학작품이고 글씨는 우리나라 서예사를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 어느 유물 보다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승탑의 건립은 불탑과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부도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부도는 붓다의 음역이라고 하며 원래는 부처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승려들까지도 부처와 같이 존경하여 부도라 일컫게 되고 나아가 승려의 묘탑이 부도라는 것으로 굳어진 듯하다

인도의 승탑은주로 소탑형으로 만들어져 불탑의 주변에 배치되는 것이 특징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절의 외곽에 따로 탑원을 마련하여 승탑과 탑비를 안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승탑의 형태는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불탑과 별개의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탑비는 특별한 법식이 없고 일반적인 비석과 동일하게 시대의 양식을 적용하여 조성되어 왔다.

122호 23면,  2021년 8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