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78)

우리문화의 정수 판소리(4)

클래식에 취미가 없는 사람들에게 서양의 오페라는 바로 듣고 즐길 수 있을 만큼 쉬운 상대는 아니다. 우리의 판소리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서양의 오페라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어쩌다 들어 본 판소리에 마음이 실리고 절로 흥이 나는 경험을 한번씩은 해 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에 녹아있는 전통이 갖는 힘이다.

판소리다섯마당(3)

적벽가

<적벽가>는 중국 위나라, 한나라, 오나라의 삼국 시대에 조조와 유비와 손권이 서로 싸우는 것이 내용으로 된 중국 소설 <삼국지연의>가운데, 적벽강에서의 싸움과 그 앞과 뒤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인데, ‘화용도’라고도 불린다.

판소리 <적벽가>는 적벽 싸움 부분이 그대로 소리로 짜인 것이 아니고, 그 대목을 중심으로 몇몇 부분이 덧붙거나 빠져서 소리 사설이 되었으므로, <적벽가>의 사설을 그대로 옮긴 소리책은 소설 <삼국지>와는 줄거리나 문체 따위가 사뭇 다르다.

소설 <삼국지>가 언제부터 판소리로 짜여 소리로 불리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왕조 순조 때에 송만재가 쓴 “관우회”라는 글에 <적벽가>가 판소리 열두 마당 중의 하나로 꼽힌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영조, 정조 무렵에는 그것이 판소리로 불렸으리라고 짐작된다.

<적벽가>를 잘했던 명창으로는, 역대 명창 가운데서도 첫손으로 꼽히는, 순조 때의 송흥록이 있고, 같은 무렵의 모흥갑이 있다. 방만춘도 잘했는데, 그가 적벽강에 불 지르는 대목을 부를 때는 소리청이 모두 불바다가 되는 듯했다고 한다. 송흥록과 모흥갑에게 소리를 배웠던 주덕기는 특히 조자량이 활 쏘는 대목의 긴박한 장면을 극적으로 잘 나타내었다고 한다. 철종 때의 명창으로는, 서편제 소리의 시조로 꼽히는 박유전이 있고, 같은 무렵의 박만순은 특히 조조가 화용도를 지나는 장면을 잘했다고 한다.

그밖에도 정춘풍, 김창록, 서성관 들이 <적벽가>를 잘해서 이름을 떨치었고, 조금 뒤에 태어난 이창운은 조조가 도망하는 대목에 나오는 ‘새타령’을 잘하기로 이름이 났었다고 한다.

고종 때에는 박상도, 조기홍, 박기홍, 송만갑, 유성준, 이동백, 김창룡이 <적벽가>를 잘했다는데, 특히 박기홍은 유비가 제갈양을 찾아가는 대목인 ‘삼고초려’와, 유비가 조조에게 크게 패한 대신에 조자룡과 장비가 큰 공을 세운 ‘장판교 싸움’, 화용도에서의 ‘군사 설움 타령’이 모두 신기에 이르렀었다고 하며, 김창룡은 ‘삼고초려’를 잘했다고 한다. 그 뒤로는 장판개, 조학진, 그리고 임방울, 김연수, 강장원이 잘했다. 오늘날에는 정광수, 박동진, 박봉술, 정권진이 <적벽가>를 부르고 있으며, 박동진, 박봉술, 한승호가 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기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적벽가>는 내용으로 보아 삼고초려, 장판교 싸움, 군사 설움 타령, 적벽강 싸움, 화용도, 이렇게 다섯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바디에 따라서는 장판교 싸움이 없는 것도 있다. 정권진의 <적벽가>에는 장판교 싸움이 없고, 그 대신에 박망파 싸움이 있다. 삼고초려에도 장수의 위엄있는 기상을 그리느라고 웅장하고 유유한 소리가 많고, 장판교 싸움과 적벽강 싸움에서는 큰 싸움이 벌어지는 긴박한 과정이 많아서 잦은몰이 장단에 우조 소리가 많고, 군사 설움 타령이나 화용도 대목에는 슬픈 계면조 소리와 재담이 많이 들어 있다. 임금이나 사대부들은 판소리 가운데서도 가객이 목청이 당당하고, 호령을 하듯 소리를 질러야 하고, 부침새를 잘 구사해야 하는 <적벽가>를 특히 좋아하여, 송흥록, 모흥갑, 주덕기, 정춘풍, 박만순, 박기홍과 같은 대명창들이 다투어 <적벽가>를 불렀다.

판소리의 음악적 특징

판소리도 그 밖의 모든 극음악처럼 편의상으로 상층 구조와 하층 구조, 또는 필요 조건과 충분조건이라는 개념으로 나누어 접근할 수 있는데, 줄거리나 배경, 주인공의 성격 같은 것은 전자에 속하고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해 내는 음악 어법은 후자에 해당될 것이다. 따라서 상층 구조나 필요조건이 어떻게 청중에게 이해되고 청중에게서 공감을 얻는 가의 문제가 바로 판소리의 예술성과 미학적 기술이 될 것이다. 그래서 춘향가의 “이별가”대목을 슬픈 계면조의 음악으로 부르는 명창이 있는가 하면 꿋꿋한 우조(경드름)의 음악으로 부르는 명창도 있고, 박석티고개에서 회강에 젖은 어사 이도령의 심경이 용의주도한 성격의 음악적 내용으로 묘사될 수도 있고 의지있는 사나이의 불타는 적개심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이러한 미학적인 관점을 설명하는 판소리 용어가 “이면”이라는 말이다. 판소리를 비평하면서도 “잘 그렸다” 또는 “잘못 그렸다”하는 대상이 바로 이면이다. 곧 “이면을 잘 그린”판소리가 빼어난 판소리이다.

판소리의 이면을 그리는 역량 곧 전문인들이 상층 구조인 극적 상황을 하층 구조인 음악으로 해석하는 표현 기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개인의 사고틀과 음악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면을 그리는 전문인의 역량이 깊으면 깊을수록 판소리는 다양하고 변화가 많은 선율 형태로 나타나고 그 역량과 연륜이 깊지 못하면 “제 갈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고” 단조로운 음악을 구사할 뿐인 이의 소리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광대가 한 명 태어나려면 보통 15년에서 30년까지에 이르는 피나는 수련기간이 필요하고 이러한 긴 수련기간을 거치고도 진정한 의미의 명창이 된다는 보장이 없을만큼 어려운 예술이 판소리였다. 그렇게 모험에 가까운 수련에 광대들이 투혼을 불살랐던 것은 첫째로 판소리에 대한 애착때문이요, 둘째로 명창이 되기만 하면 그 다음에 주어지던 신분의 격상과 경제력 때문이었다.

판소리는 궁중음악이나 불교 음악인 범패처럼 의식이 음악에 앞섰던 “타율적인 음악” (의식음악)이 아니고 음악으로서 인간 자체를 표현하는 “자율적인 음악”(감상음악)이다. 그러므로 판소리는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경지에 도달해서 깊은 공감과 감탄을 끌어 내는데, 이 힘은 판소리의 음악적 세 요소인 성음(음색), 길(음계), 장단(리듬패턴)에 있다.

1253호 23면, 2022년 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