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32)

독일 최고(最古)의 도시 트리어(Trier)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Porta Nigra에서 시장 광장으로 가는 길

800여년은 위풍당당한 성문으로, 그리고 또 다른 800여년을 교회의 모습으로 트리어 구시가지 입구를 지켰던 트리어의 상징, 검은 성문(Porta Nigra). 그 기구한 역사를 우리는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다.

역사는 그 어느 것 하나 홀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다. 상호 영향을 주며 시대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시대에서는 많은 인물이 탄생해 그 시대를 구성하는 수많은 사건을 만들어 내며 또다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곤 한다.

성문으로 고대 로마의 영광을, 시메온 교회로서, 중세 천년의 성지였던 Porta Nigra와 그 앞 광장은 칼 마르크스와 같은 새로운 인물을 잉태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 박해와 같은 사건의 현장이 된다.

이제 우리는 검은성문에서 시장광장(Hauptplatz)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들 유적들이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보자.

칼 마르크스와 트리어

Porta Nigra를 등지고 시장광장으로 뻗은 거리가 시메온(Simeon)거리이다. 왼쪽에는 시메온 교회 부속 건물로 트리어 관광안내소(Tourist Information)가 있는데, 이곳에서 판매하는 기념품만 살펴보아도, 트리어 도시의 역사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시메온 거리 맞은편에는 작지만 마르크스 가족이 처음으로 소유한 집으로, 마르크스가 대학에 진학한 1935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던 주택이 있다. 마르크스 생가(박물관)보다 한층 더 의미를 갖는 곳이지만 의외로 기념 동판만 달랑 부착되어있다.

그리고 관광안내소를 돌아 뒤쪽으로 가면 조그만 광장(Simeonstiftplatz)이 있는데,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거대한 마르크스 동상이 서있다. 이 동상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중국이 트리어 시에 기증한 것이다.

이렇듯 Porta Nigra앞 광장 거리는 19세기중엽부터 20세기말까지 세계 정치를 양분하다시피 한 정치 이념가 칼 마르크스가 호연지기를 기르던 공간이었다.

아쉽게도 이번 역사산책에서는 시간 관계로 마르크스 생가(박물관)는 살펴볼 수가 없다. 그래서 간단하게 마르크스 생가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곳에서 함께 살펴보도록 한다.

마르크스가 태어난 생가는 시메온 거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브뤼켄거리(Brückenstraße)에 위치해 잇다. 3층짜리 건물로 지금은 ‘마르크스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박물관이라고 하지만 특별한 권위나 위용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바로 옆 4층 건물에 눌려 움푹 들어간 모양새다.

독일풍의 소박한 구조와 장식의 생가에서 마르크스 가족은 이 건물 1층 방 2개와 2층 방 1개에 세들어 살았다고 한다. 방이 전부 10개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당시 3~4가구가 함께 거주했던 집이었을 듯하다. 이 건물은 1928년 이후 지금까지 마르크스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마르크스 생가에는 마르크스의 생활과 삶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변천사도 각국의 사례와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념의 시대가 지난 오늘날, 방문객들은 부담 없이 19세기말부터 20세기 말까지의 세계 사회주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마르크스 개인사와 당시의 시대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로운 공간이 될 듯하다.

한편 유대인이자 제1호 공산주의자로서, 히틀러 나치 정권과 상극이었기에,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박물관 건물이 인쇄공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이 건물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7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형이 일찍 죽으면서 장남이 된다. 우연의 일치인지, Porta Nigra의 복원을 명한 나폴레옹은 마르크스가 태어나고 3년 뒤 마르크스의 탄생일인 5월 5일에 사망하였다. Porta Nigra를 복원한 나폴레옹, 그 광장에서 유년기, 청년기를 보낸 마르크스, 이렇게 역사에서는 서로 시기는 달리하여도 관계 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 박해의 상징 Judengasse

시메온 거리를 시장광장 쪽으로 더 걷다보면, 15-16세기 전형적인 독일 건축양식 건물인 3채의 Fachwerk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외관과 세 채가 연이어 있어 거리를 앞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작은 아치형 입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Judengasse이다.

이 아치형 입구가 바로 트리어에 있는 유대인 게토의 입구였다. 유대인 게토의 입구는 원래 Jakobstraße와 Stockplatz 등에도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이곳에 유대인 게토임을 알리는 현판이 붙어있다.

이 유대인 게토 입구는 저녁이면 쇠사슬로 묶여 통행이 봉쇄되었고, 전염병, 또는 특정한 일이 벌어졌을 때에는 쇠사슬을 풀지 않아 이 유대인 게토는 정기적으로 유대인들을 위한 감옥이 되곤 하였다.

트리어의 유대인들은 14세기 초 트리어에서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그들은 유대인 재정 고문을 대접한 룩셈부르크의 볼드윈(Baldwin of Luxembourg)의 도움을 받았었고, 이는 모든 유대인들의 부러움을 불러일으켰을 정도였다. 그러다 트리어에서 전염병이 시작되자 그 질병이 유대인들에게서 유래되었다고 박해를 하였으며, 1349년에는 유대인에 대한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1418년에는 Otto von Ziegenhain에 의해 유대인들은 마침내 Trier에서 모두 추방되었다. 이후 18세기 초엽까지 트리어에서는 유대인 공동체가 사라졌다.

18세기 중반부터 트리어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재성립이 되었으나, 나치(국가 사회주의)시대 이들에 대한 박해는 한층 강화되었다.

히틀러가 집권했던 1933년에는 796명의 유대인이 트리어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트리어 주민의 약 1%를 차지했다. 1935년에는 그 유명한 “뉘른베르크 법”이 제정되었다. 1935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연례 전당 대회에서 나치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근간이 되는 인종 이론을 제도화한 새로운 법을 발표했다. 이 법은 독일계 유태인들에게서 제국 시민권을 박탈하고 이들이 “독일인 또는 관련 혈통”을 가진 사람과의 결혼을 금지하였다. 부칙 법령은 유태인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고 대부분의 정치적 권리를 빼앗았다.

1938년 11월 9일 밤, 유태인에 대한 폭력이 독일 전역에서 발생했다. 이른바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즉 “산산 조각난 유리의 밤” 또는 “수정의 밤”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상점의 창문 유리들이 깨져 거리에 흩어져 있는 광경을 묘사한 것 이었다

이틀 만에 250개의 예배당이 불타고, 7,000개 이상의 유태인 상점이 폐허가 되고 약탈되었으며, 수십 명의 유태인이 살해되었다. 유태인 묘지, 병원, 학교 및 가정집 등이 약탈되었는데, 경찰과 소방대는 이를 방관만 하였다.

트리어의 유대인들도 이를 피해갈 수가 없었다. 트리어 유대인 회당이 파괴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부상을 입었다.

1942년에는 트리어 거주 모든 유대인이 리츠만슈타트수용소 또는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불과 14명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고향 트리어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화려한 Fachwerk 주택 밑의 유대인 게토의 입구 Judengasse에서 우리는 인류 보편적 박애의 가치와 지난날을 기억하며 끊임없이 자신들의 잘못을 상기하는 독일인들의 정직함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탑 형식의 주거건물 Dreikönighaus

Judengasse 건너편에는 중세 초기의 독특한 탑형식의 주택(Turmhaus)을 볼 수가 있다. 바로 Dreikönighaus이다.

발굴을 통해 트리어에는 13개의 중세시대 탑형식의 주택이 있던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현재에는 대표적인 세 건물만을 살펴볼 수가 있다. Dreikönighaus(1230년경), Frankenturm(1100년경), Turm Jerusalem(1070년경)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러한 주택형식은 유럽 전역에서도 몇 남지 않은 유적이라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초기 탑 형식 주택은 성직자들이 주거 및 방어 건물로 사용하는 반면, 후기 탑 형식 주택은 대부분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을 위한 주거용 건물로 사용되었는데, Dreikönighaus는 Trier의 판사와 평의원 가족들을 위한 주택으로 추정된다.

Dreikönighaus는 1200년경에 시작되어 1231년에 완성되었는데, 원래 두 개의 독립적인 건물(전면 및 후면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나중에 계단으로 합쳐졌다. 앞 건물은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건물로, 다른 탑형식의 주택과는 달리, 달리 정면은 회반죽과 채색된 대표 면으로 설계되었다. 주 출입구는 원래 1층의 높은 출입구였으며, 문이 세 쌍의 쌍창(현재 오른쪽 출입구 위) 옆에 약간 더 낮게 설정되어 있다. 당시에는 나무 계단으로만 집에 들어갈 수 있었고, 전쟁 등 위험할 경우 이를 해체하고 개폐식 사다리로 교체했다.

1256호 20면, 2022년 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