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8)

하버드대학교에서 만난 안평대군 글씨

표지를 보는 순간 코끝이 알싸했다. 마치 매운 마늘을 먹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분의 흔적을 여기서 마주하다니 뜻밖이었다. 그것도 탄생 600년인 해(2018)에 말이다. 수년 전에 하버드대 새클러 갤러리에 안평의 진적(眞迹)이 있다 했으나 주인이 안평대군이 확실하다는 증거는 부족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표지에서부터 그의 안타까운 일생이 기록되어 있다.

안평대군! 조선의 성군 세종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뛰어난 문예와 풍류로 세상을 들썩이게 했다. 그의 무계정사(武溪精舍, 안평대군이 사용하던 정자 또는 별장)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시, 서예, 그림에 출중하여 삼절(三絶)로 불린 그는 장차 부친이 이룩한 조선 문명의 전성시대를 이끌 지도자였다. 그가 꾼 꿈을 안견이 그림으로 남긴 「몽유도원도」는 지금도 조선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뛰어난 송설체(松雪體, 중국 원나라의 서예가인 조맹부의 글씨체)는 조선을 넘어 중국에까지 명성을 날렸다. 이처럼 당대 최고라 불린 조맹부를 넘어선 그의 작품 속의 예술세계는 세상 풍문으로만 전해 오고 남아 있는 바가 거의 없었다.

조선 개국의 잔혹사인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손주 대에 이르러 재현되었다. 왕권을 탈취한 수양(세조)이 눈엣가시인 안평을 가만둘 리 없었다. 결국 형에 의해 역모의 죄를 뒤집어쓴 그는 강화에서 불꽃같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때 안평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그의 아들도 사약을 받고 딸과 며느리는 정적인 권람의 노비로 끌려가니 권력의 비정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동생의 탁월한 문예를 질투했던 수양은 안평의 작품을 쓸어 모아 전부 불태워 버렸다. 때문에 그의 글씨는 극히 일부만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부왕의 묘비, 외조부의 묘비, 동생의 묘비에 쓰인 글씨가 국내에 현존하는 안평대군 유작의 전부라 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지위에 있던 이들의 묘비명을 도맡아 썼던 것에서도 그의 탁월함과 비범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을 위한 작품은 거의 남기지 못했으니 그의 재능을 아끼는 사람들로서는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이의 예술세계를 흠모하는 후세인들이 그의 자취를 좇은 지도 오래다. 대표적인 인물은 튀니지 대사를 역임한 김경임 선생이다. 그는 저서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를 통해 안평의 짧았지만 위대한 자취를 찾는 여정을 소개하고 있다. 「몽유도원도」가 최상의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안평의 꿈을 펼쳐 놓았기 때문이라 한다. 다시 말해 이야기 구성이 멋지고 훌륭하다. 그곳에는 안평의 못다 이룬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더 가슴 아프다.

안타깝게도 「몽유도원도」는 지금 일본에 있다. 이를 되찾아 오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지만 정작 실행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감지에 금가루 글씨로 쓴 안평대군의 글씨

사라진 묘법연화경 사경문은 어떻게 하버드대학으로 갔을까

1446년, 세종은 예조에 명해 세상을 떠난 소헌왕후를 위하여 경기도 고양의 대자암에서 천도제를 열게 했다. 그리고 집현전에 명을 내려 금니사경(金泥寫經, 금가루 글씨로 쓴 사경문)을 봉안토록 하고 아들인 수양과 안평에게 사경작업에 참여토록 한다. 사경이란 공덕을 쌓기 위해 경전을 베껴 쓰는 불교 의식을 말한다. 글씨 하나 쓸 때마다 절을 하는데 그만큼 정성을 중하게 여기는 행위라 할 만하다. 그렇게 완성된 『묘법연화경 사경문』이 대자암에 봉헌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자암은 임진왜란 때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장기간 점령당하게 된다. 이때 안평대군의 유작들이 약탈당해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그 후 일본 GHQ(미군정)에서 문화재 담당이었던 헨더슨에 의해 하버드까지 간 것으로 추정된다.”

김경임,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중에서

아래는 『묘법연화경 사경문』의 제작과 관련해 세종 28년(1446) 5월 27일에 기록된 「세종실록」의 일부다.

승도들을 모아 경을 대자암에 이전하다.

승도(僧徒)들을 크게 모아 경(經)을 대자암(大慈菴)에 이전하였다. 처음에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 이영서(李永瑞)와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등을 명하여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집에서 금(金)을 녹이어 경(經)을 쓰고, 수양(首陽)·안평(安平) 두 대군(大君)이 내왕하며 감독하여 수십 일이 넘어서 완성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크게 법석(法席)을 베풀어 대군(大君) · 제군(諸君)이 모두 참예하고, 이 회(會)에 모인 중이 무릇 2천 여 명인데 7일 만에 파(罷)하였으니, 비용이 적지 않았다.

소윤(少尹) 정효강(鄭孝康)이 역시 이 회에 참예하였는데, 효강이 성질이 기울어지고 교사(巧邪)하여 밖으로는 맑고 깨끗한 체하면서 안으로는 탐욕을 품어, 무릇 불사(佛事)에 대한 것을 진심(盡心)껏 하여 위에 예쁘게 뵈기를 구하고, 항상 간승(奸僧) 신미(信眉)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우리 화상 (和尙)은 비록 묘당(廟堂)에 처하더라도 무슨 부족한 점이 있는가.” 하였다.

아마 이때 금을 녹여 불경을 쓴 것으로 세종의 원찰(願刹)인 대자암에 봉헌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쿄박물관 오구라 컬렉션 목록(920)에는 ‘행서칠언율시축(1폭, 34.1×56.5 지본 묵서, 이용(안평대군)’이 있다. 박물관 측에 열람을 요청했지만 열람을 제한한다는 안내만 받았다. 결국 탄신 600주년에 그의 작품을 만나는 일을 이루지 못했다.

1257호 30면, 2022년 3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