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13)

경북 상주를 지킨 동방사와 파리로 간 천수천안관음상

경상도라는 지명은 1314년(고려 충숙왕 1년)에 경주와 상주의 첫 글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북으로는 백두대간의 줄기인 속리산이 우람하게 솟아있고, 남으로는 낙동강 줄기가 평야를 휘돌아 흐르고 있다. 그 안에 산과 물, 들이 고루 펼쳐지니 너도 나도 인심이 넉넉한 곳, 그곳이 경상도다.

그러나 산 좋고 인심 좋은 넉넉한 상주에 살던 옛 선인들에게도 근심이 있었으니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지네(蜈蚣) 형상 때문이었다.

상주여자고등학교 서쪽에는 밤나무 숲이 우거진 율수(栗藪)라는 제방이 있다. 선인들은 노음산에서 시작해 북천에 이르는 지형이 지네를 닮아 그 때문에 소년들의 죽음이 많다고 여겼다. 그래서 액을 막기 위해 그 반대편인 율수에 지네가 싫어하는 밤나무를 잔뜩 심었다 한다.

1873년(고종 10) 지금의 상주시 복룡동에 세워진 ‘조공제’라는 저수지의 비문에 따르면, “1871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조병로가 밤나무 숲에 둑을 다시 쌓고 마을 이름을 율수리 또는 밤숲개로 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지네 형상의 풍수설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두 번째 근심은 배 모양의 형세였다.

상주 시내 한복판에 옛 동방사 터가 있다. 대개는 산속이나 그 언저리에다 절을 짓는데 특이하게도 동방사는 고을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그 이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고려 우왕 때 자초 스님이 창건한 동해사(東海寺)의 기록에 있다.

1881년 제작된 『동해사실기東海寺實記』에는 “상주 들녘이 떠다니는 배의 형국과 같아 배를 묶어 두기 위해 병성천과 북천의 사이에 가짜산(假山)을 만들어 동방사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주 시내의 지형은 북동쪽에서 흐르는 물과 남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복룡동에서 합수하여 병성천으로 이어지고, 그 가운데 충적평야가 자리하고 있는 형세이니 선인들은 동방사로 하여금 상주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동방사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이다. 비보사찰이란 풍수적으로 산천의 기운이 조화롭지 못한 곳에 부족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짓는 사찰로, 사찰 대신 불탑이나 불상을 세우기도 한다.

비보사상은 신라 때 도선국사가 주창하여 고려에 와서 크게 전파되었다. 비보사찰인 동방사는 불교의 부흥기인 신라 때 창건되어 고려를 거쳐 융성하였으니 그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

동방사의 기억들

신라 말 창건되어 크게 일어났던 동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복원의 기회를 놓쳐 지금은 절터가 농토가 되고 말았지만 동방사의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 있다. 복룡동 207-2번지에 남아 있는 동방사의 당간지주는 천년의 시간을 말해 주고 있다.

현재 왕산공원(상주시 서성동)을 지키는 석불은 동방사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동글한 얼굴, 내리뜬 눈과 묵직한 콧방울, 도톰한 입술은 마치 만화 속의 캐릭터와 닮았다.

동방사 복원에 힘쓰는 동조 스님(상락사 주지)은 “비로자나불의 모습은 당시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을 간직하고 있어요. 동방사가 비보사찰로 물의 피해를 막기 위해 창건, 석불을 조성했다는 것은 떠내려가지 말고 영원히 자리를 지켜 달라는 마음이죠”라며 동방사와 비로자나불의 의미를 전한다. 하지만 현재 비로자나불은 원래의 자리를 떠나 왕산공원 가장 높은 곳에서 상주를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밭이 된 동방사 터에서 농사짓는 이는 요즘도 기와 조각, 그릇조각 등 관련 유물이 나온다고 말했다. 당간지주가 있는 주변의 농지에서 “조선시대 자기, 와편과 함께 신라시대 단선문, 고려시대 어골문 와편이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 신라 말이나 고려 초 사원이 위치하였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라고 <상주문화 제22호>에 기록되어 있다.

파리까지 간 철불관음상

천수천안(千手千眼),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만 세상을 살펴보고 구원하겠다는 지극한 소원을 담았다. 국내에도 몇 곳에 비슷한 형태의 불상이 있으나 동방사 관음보살처럼 오랜 역사와 예술적 완성도를 갖춘 불상을 만나기는 어렵다.

천수천안관음상

아시아 유물을 모아 놓은 파리 기메동양박물관의 한국관 전시실 복판에서 천수천안관음상이 방문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고 한다. 천수천안관음상은 1882년 조선 기행에 나선 샤를 바라가 수집해 기메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바라는 자신의 조선 여행을 기록한 『조선기행』에서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출발, 일본과 중국을 거쳐 인천에 도착, 한양을 경유하여 문경새재를 넘고 낙동강변을 따라 대구, 부산에 이르기까지 기행하였다”라고 썼다. 당시 상주는 규모가 큰 고을로 이 이방인은 상주에 들러 특별하게 생긴 천수천안관음상을 수집했을 것이다.

천수천안관음보살상이 동방사 출토품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불행하게도 동방사 사적기나 향토사 등의 관련 기록에서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샤를 바라가 남긴 기록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그는 난생처음 본 신기하게 생긴 불상을 보며 동방사의 옛 이야기를 함께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사연을 담고 있는 동방사를 기억하기 위해 ‘동방사 출토품’이라는 기록을 남겼을 것이라 추정된다.

천수천안관음상을 동방사로 봉안하고 각지에 흩어진 유물을 원상회복하는 일은 상주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동방사의 옛 이야기를 완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

1262호 30면, 2022년 4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