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37)

독일 최고(最古)의 도시 트리어(Trier) 마지막회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트리어: 유럽문화의 두 기둥, 그리스로마와 기독교 유산이 가득한 곳

유럽문화는 고대 그리스-로마 그리고 중세 기독교 유산을 그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시대의 건축, 조각 등은 로마제국을 통해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고, 그렇기에 비록 로마시대의 유적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그리스 문화의 숨결이 살아있다.

또한 기독교 중심의 중세 1000년은 유럽인들 삶속에 깊이 내제되어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유럽의 문학, 미술, 음악, 건축 등 문화 전반에는 그리스-로마의 이야기, 성서와 기독교 성인들의 삶을 그 주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유럽문화의 두 기둥인 그리스-로마,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보듬고 있는 도시로는 트리어만한 곳이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고대 로마의 유적인 “검은 성문(Porta Nigra)”을 시작으로 중세의 도시 모습, 그리고 지난 호에 트리어 대성당과 성모교회를 살펴보았고, 이제 성당지역을 벗어나 콘스탄틴 바실리카와 선제후궁전, 그리고 황제목욕탕을 살펴보며 트리어 역사탐방을 마치도록 한다.

콘스탄틴 바실리카

현존하는 로마 시대의 건축 중 가장 큰 단일 공간성모교회 앞 길인 Liebfrauenstrasse를 따라 시내 방향으로 약 200m 내려오면 붉은 탑(Roter Turm)이 보이며 그 오른편에 웅장한 콘스탄틴 바실리카를 마나게 된다. 붉은 탑은 원래 선제후 궁전(Kurfürstliches Palais)의 일부였다. 1600년대 중반 선제후 궁전이 완성되었을 때 성벽처럼 긴 건물이 연결되고, 그 끝에 붉은 탑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궁전에서 연결된 부분이 해체되면서 탑만 독립되어 서 있다.

이제 붉은 탑을 만나게 되면 그 오른 편으로 거대한 로마식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트리어에는 고대 유적이 많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로마식 건축물도 낯설지가 않는다, 그러나 콘스탄틴 바실리카는 숨 막힐 듯 한 그 웅장함에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가로, 세로 70m X 30m, 높이 30m, 창문의 길이만도 7m가 넘는 대규모 건축물로 건물 전체의 모습을 한 눈에 담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콘스탄틴 바실리카(Konstantinbasilika)는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시대인 311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한 용도였으며, 팔라틴 홀(Aula Palatina)이라고도 부르는데, 방이 나뉘지 않은 단일 건물로 따지면 로마 시대의 건축 중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건축물로 꼽힌다.

중세에는 그 용도가 시대에 다라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전쟁 시에는 요새로 활용되었고, 평시에는 시민들의 모임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한 때에는 트리어 대주교가 머무는 관저로도 사용되었다. 1600년 중반 선제후 궁전(Kurfürstliches Palais)이 바로 이웃하여 건축되면서 콘스탄틴 바실리카는 선제후의 회관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건물이 많이 변형되었다가 19세기 중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IV)의 명으로 원래 로마 시대의 스타일로 다시 지었다. 다만 외부만 복원되었을 뿐 내부는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빌헬름 4세의 명에 따라 1859년부터는 개신교 교회(Kirche zum Erlöser)로 사용되고 있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트리어는 프로이센에 복속되었다. 이는 고대시대에는 “제 2의 로마”로, 중세 1000년 동안은 유럽 기독교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경함한 트리어 시민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변화 못지않게, 종교문제로도 트리어시민들은 큰 좌절을 겪게 된다.

가톨릭의 중심지였던 트리어에는 개신교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고, 당연히 시민들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개신교국가인 프로이센으로의 복속은 필연적으로 개신교교회가 등장하게 되었고, 기존의 가톨릭 교회건물 일부를 개신교교회로 정해야 했다. 이로 인해 트리어 시민들과 프로이센은 많은 갈등을 겪게 되고, 수차례 가톨릭교회 건물을 개신교 교회로 사용하려던 시도는 시민들의 저항으로 결국 무산되고, 프로이센은 비종교적 건물인 콘스탄틴 바실리카를 개신교 교회로 결정하게 된다.

그러자 시민들은 같은 해(1859) 자발적 모금을 통해, 콘스탄틴 바실리카가 내려다보이는 모젤강 건너편 산 위 300m 정상에 40m높이의 마리아 기념비(Mariensäule) 건축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866년 완성된 마리아기념비는 트리어시민들의 프로이센에 대한 저항의 상징물이 되었고, 2007년에 새롭게 정비되었다.

선제후 궁전

선제후 궁전(Kurfürstliches Palais)은 트리어의 대주교가 머물던 궁전으로, 궁전과 바로 붙어있는 콘스탄틴 바실리카(Konstantinbasilika)가 먼저 존재했었고, 여기에 1615년부터 순차적으로 건물을 붙여 3채의 궁전이 ㄷ자 모양으로 연결되었다.

트리어의 여러 궁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선제후 궁전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로코코 양식의 화려함으로 방문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오늘날에는 행정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일반인의 입장은 제한된다.

1층에서 2층 홀로 올라가는 계단과 천장 벽화와 조각들이 특히 유명한데, 뷔르츠부르크(Würzburg)의 레지덴츠(Residenz)가 연상될 정도로 흡사하다. 아마도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를 건축한 Balthasar Neumann의 학생인 Johannes Seiz가 건축을, 발타자르 노이만과 함께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건축을 함께 Ferdinand Tietz가 조각 작업을 맡았기에 그러할 것이다.

궁전 앞에는 아름다운 궁정 정원(Palastgarten)이 있다. 이 역시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정원과 유사하게, 조각상과 프랑스식 조경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답기만 궁전과 정원도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803년부터는 프랑스군대가, 나폴레옹의 몰락 후에는 프로이센 군대가 트리어에 진주하게 되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18년까지 선제후궁전은 군인들의 병영으로, 정원은 흙으로 메워지고, 다져져 연병장으로 사용되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재건계획으로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궁전정원 옆으로 황제목욕탕((Kaiserthermen)에 이르는 길에는 옛 도시성벽이 여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잠시나마 현대에서 벗어나 중세기의 삶의 경험해 볼 수 있다.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이번 역사산책의 마지막 목적지인 황제목욕탕에 다다르게 된다.

트리어에는 세 곳의 로마 목욕탕이 있다. 바르바라 테르멘(Barbarathermen), 피마르크트 광장 테르멘(Thermen am Viehmarkt), 그리고 카이저 테르멘(Kaiserthermen)이다. 이 중 4세기에 만들어진 카이저 테르멘이 가장 늦게 건설된 것이며,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고 가장 유명하다. 물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아치형 건물의 벽면, 그리고 지하 통로와 목욕탕의 폐허들이다. 아치형 건물은 길거리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굳이 유료 입장을 하지 않아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울타리 너머로도 폐허의 일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입장료를 지불하고, 경내로 들어가면 지하 통로와 건물 내부의 골격을 살펴볼 수가 있는데, 건물 내부로 물을 끌어와서 뜨겁게 가열하여 목욕수를 만드는 보일러실 등, 로마시대의 목욕탕 운영 방식을 경험할 수 있다.

한편 Südallee에는 또 하나의 로마 유적 바르바라 테르멘(Barbarathermen)이 있다. 고대 로마제국의 목욕탕 터가 남아있는 곳이다. 2세기 중반에 지어졌으며, 당시 시내 중심에 있던 테르멘(목욕탕)이 도시의 성장에 따라 너무 협소해지자 시가지 외곽에 크게 테르멘을 새로 만든 것이다.

건설 당시 로마 제국의 수많은 목욕탕 중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것이었고(가장 큰 것은 수도 로마에 있었다), 로마 제국 이후의 시대에도 어느 정도 그 현상은 유지되었으나 결국 시대가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테르멘의 이름은 이 주변에 있던 교회 이름이 성 바르바라 교회(Pfarrkirche St.Barbara)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목욕탕 터는 한동안 일반에 공개되었으나 2000년부터 폐장하였다. 아마 유적의 훼손이 너무 심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다른 로마목욕탕 유적은 피마르크트(Viehmarkt) 광장에 있다.

이곳은 트리어 구시가지 내에서는 가장 넓은 광장이기 때문에 지역 행사가 열리면 놀이시설이 들어서는 곳이다. 이곳의 로마목욕탕 유적은 피마르크트 광장의 테르멘(Thermen am Viehmarkt)이라고 불리는데, 고대 로마 제국에서 AD 80년경에 지은 것이다. 이후 폐허가 되어 땅 속에 묻혀있던 것을 1987년 지하 주차장을 만들기 위한 공사를 하다가 발굴되었다. 트리어 시는 그 자리에 유리 건물을 지어 위를 덮고, 방문자는 건물 내부에서 지하로 내려가 유적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1998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바르바라 테르멘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황제목욕탕(Kaiserthermen)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원형경기장(Amphitheater)도 트리어의 로마유적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기원후 100년 경 지어진 이 원형극장은 당시 2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대형 극장이었다. 로마의 극장이 그러하듯, 검투사들이 동물과 사투를 벌이는 것을 구경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오늘날에도 원형극장의 골격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이곳에는 지하로 내려갈 수 있도록 통로를 마련해두었는데, 지하에는 건축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또한 객석이었던 높은 곳에도 올라가볼 수 있는데 이 곳에서 극장을 내려다보면 그 규모가 더욱 실감이 난다.

트리어 도시의 시작은 성벽을 둘러싼 네 개의 문 가운데 현존하는 검은 성문(Porta Nigra), 그리고 검은 성문에서 직진으로 이어지는 도시 안의 구조, 그 한가운데 트리어 대성당과, 성모교회, 그리고 ‘콘스탄틴 바실리카’와 ‘선제후궁전’이 있다. 그 앞으로는 황제의 온천을 비롯한 온천시설이 위치하고 트리어 도시 성벽의 맨 끝에 위치한 ‘원형경기장’으로 도시 탐방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유럽 문화의 두 기둥인 ‘그리스-로마’와 ‘기독교’의 다양한 유적을 만날 수 있는 트리어는 독일의 보물이자, 살아있는 역사현장이다. 독자분들은 꼭 한 번 방문해볼 것을 권한다.

1276호 20면, 2022년 7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