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 / 104

한국 여성계의 선각자들 ②

19세기말과 20세기 전반의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불행히도 일제의 식민지 시대와 맞물려, 우리의 민족정기와 역사가 왜곡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식민지 시대라는 외적 요인과 더불어 유교를 숭상한 선비의 나라 조선의 몰락, 그로 인해 유교의 장점보다는 부작용만이 우리 정신을 지배하던 20세기 전반의 우리 민족은 내적으로도 시대정신을 잃은 채 방황하던 시기였다.

문화서옵단의 문화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어려운 시대에서 남존여비라는 봉건적 사고방식에 항거하며 여성도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임을 선언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하여 한국 여성계에 새로운 지표를 제시한 여성으로 나혜석, 윤심덕, 최승희, 노라노 4인을 선정하여 그들의 삶과 활동을 소개한다.


절세가인 신여성 윤심덕

윤심덕은 일제 강점기의 성악가이자 가수 겸 배우로 화가 나혜석과 함께 1920년대의 신(新)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유학생이었고, 최초의 여류성악가였으며, 최초의 대중가수, 당대 최다 음반판매량 보유가수, 방송국 사회자, 그 시대의 최신 패션모델이었던 윤심덕은 또한 그만큼 그녀는 대중의 관심 속에 있었고, 가장 성공적인 신여성 중의 한 명이었다.

윤심덕은 평양에서 4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호병과 어머니 김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 신교육을 받도록 했다.

윤심덕은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에는 의사와 교사가 되기 위해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다녔다가, 음악 공부에 뜻을 두었다. 1919년, 윤심덕은 조선 총독부가 ‘일선융화’ 정책에 따라 실시하던 관비 유학생 시험에 최초로 여자장학생으로 뽑힌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토쿄음악학교 사범과에서 성악을 전공하게 된다. 윤심덕은 도쿄 음악 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이었다.

유학중인 1921년에는 학생 서클 “극예술협회”가 주축이 된 “동우회” 순회 연극단의 일원이 되어 방학을 이용해 국내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을 가진다. 이 극예술협회를 이끌던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후에 윤심덕과 동반자살을 하게되는 극작가 김우진이었다.

1924년에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고,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교사로 임용되지 않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혼담이 깨지는 등 개인적인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다. 부호의 첩이 되었다는 스캔들로 도피까지 한 끝에, 김우진의 권유로 토월회에 들어가 배우로 일하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 가요로 꼽히는 〈사의 찬미〉를 녹음하여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1926년 레코드 취입을 위하여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 레코드 회사에 갔다가 윤심덕은 그해 8월 3일에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 탑승했으며, 4일 새벽 4시 쓰시마섬을 지나던 중 자살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6년 8월 5일자 사회면에서 이들의 자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지난 3일 오후 11시에 하관(시모노세키)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배 이름)이 4일 오전 네 시경에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으며 그 선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었으며,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일백사십 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이십 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는데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情死-연인끼리의 동반 자살)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윤심덕의 일생은 화려하고도 비참했고 행운과 수난이 엇갈린 삶이었다.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였던 윤심덕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 더군다나 여성의 사회참여가 막혀있던 시기에 그 명성을 남긴 인물이기에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녀가 택한 죽음이었다. 유부남이었던 애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음으로 끝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재능보다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윤심덕의 죽음은 이렇게 통속적인 미화나 도덕적인 평가로 결론낼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당시 음악의 열정과 대중문화를 태동시키기 위한 욕구로 충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수로 활동하던 중 홀연 중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와 연극계에 투신한 윤심덕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금번 내 생활의 전환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우연히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일찍부터 생각해오던 바가 이번에 실현되었을 뿐입니다. 물론 아직 우리사회에서는 여자란 배워서 가정으로 돌아가 현모양처가 되거나 교사가 되고 간호부, 사무원 같은 것이 되어 말썽없이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특히 배우라는 것은 부량무식한 타락자나 하는 일로 알아 온 이상 나의 이번 길은 갈 곳까지 다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는 대단한 각오를 가지고 나섰습니다. 오로지 힘을 다하여 새로워지려는 당돌한 발걸음이 이에 이르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 말은 그녀가 당시 천대하던 배우의 길을 선택하면서 얼마나 당찬 의지를 가졌는가 를 보여준다. 세상의 이목을 두려워하기에 앞서 예술에 대란 정열을 불태웠던 그녀는 노래와 연극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에까지 출연함으로써 대중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1288호 23면, 2022년 10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