쾰른 한인 천주교회 신경수 (베드로) 종신부제
쾰른 한인 천주교회의 시작은 아주 작은 등불이었습니다.
2020년 6월 28일 설립 5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쾰른 한인 천주교회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독일 한인사회 역사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1961년 독일 적십자를 통해 6명의 한국 간호사가 독일에 온 것을 시작으로 그리고 1963년 12월 첫 광산 근로자들이 독일에 들어오기 시작한 이래 1977년까지 8천여명의 광부와 1만1천여명의 간호사가 파독 되었는데, 그 중 60% 정도가 기본 계약이 끝난 후 계약을 연장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독일에 장기 거주하게 되는 교민사회의 기본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독일에 들어오기 시작한 초기의 광산 근로자 중에는 실제로 광산 노동이 얼마나 어려운 일 인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 중에 한국에서부터 교회활동을 했던 가톨릭 노동 청년회 (C.A.J) 회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단조롭고 익숙하지 않았던 힘든 노동 생활 가운데에 일상을 이어갈 영신적 힘과 신앙적인 울타리에 대한 갈증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간호사의 경우에는, 독일 적십자가 전 후인 1954년부터 부산에서 운영하던 야전병원이 1959년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부산에 있던 교육생들을 대구 분도 수도원으로 소속을 옮겨 주고 떠났는데, 이들 중 6명이 1961년 독일에 간호사로 오게 된 것이 파독 간호사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40년대에 중국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신 독일의 유명한 선교사 Eichinger 신부님이 설립한 Unio Caritas Gemeinschaft를 통해서 250명의 젊은 한국 여성들이 독일에 들어 왔습니다. Eichinger신부는 경제적 지원 보다는 직업 교육 등을 통해서 개발 도상국을 돕고자 1965년부터 부산지역에 고아원과 학교를 설립해 운영했고독일의 간호와 사회복지를 배울 수 있도록Erna Schmidt 수녀를 통해서 한국 여성들을 독일로 오게 하였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초기의 파독 간호사 중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었던 당시에는 전세계 가톨릭 교회가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던 시절이라 독일에 온 한인 가톨릭 신자들도 독일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고백 성사나 영적 지도를 독일어로 할 수 없어 한국어로 성사를 받을 수 있는 기회 등 신앙 생활에 대한 갈증이 쌓이기 시작할 무렵인 1964년 부활 때 당시 로마에 유학 중이던 원필호 요한 신부가 독일에 왔다가 파독 근로자들의 이 같은 어려움을 알게 되어 그 후 방학 때마다 독일로 와서 신자들을 찾아 다니며 고해 성사와 영적지도를 하기 시작하면서 독일 한인 가톨릭 공동체가 태동 되었습니다.
원필호 신부님은 1965년 광산 근로자들이 많았던 딘스라켄 지역 신자들을 중심으로 “재독 한인 가톨릭 청년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인근 Vincentius 성당의 젊은 보좌신부였던 Viktor Roeloffs신부의 도움으로 딘스라켄의 Johanneshaus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1966년 6월 ‘등불’이라고 하는 교우 소식지를 발간해서 독일 각지에 흩어져 있던 교우들에게 매월 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원 신부님의 지도하에 1967년부터 연2회 1박2일로 “재독 한인 가톨릭 남녀 교우 교육”을 실시해서, 독일의 직업교육, 외국 노동자의 법적 지위, 국제 결혼의 장단점 등 파독 근로자들의 독일 사회 적응과 이해를 신앙의 틀 안에서 돕고자 하는 교육들도 이루어졌는데, 당시 1차 교육 후에 차기 교육을 준비하기 위해서 조직 되었던 “재독 한인 가톨릭 교우회” 가 현재의 쾰른 한인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된 셈입니다.
1968년 원 신부가 귀국하게 되자 교우회는 한국 주교회의단에 한인 교우를 위한 공식 담당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은 초기 한국교회의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천주학을 도입하고 주문모 신부를 중국에서 모셔온 것과 비슷합니다. 당시 쾰른 교구장 Frings추기경이 마침 외국인 근로자들의 모국어 신앙생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발표에 힘입어 한국사제의 파견은 수월하게 진행 되었습니다.
교우회가 전담 사목자를 초청하는 데에는 70년대 카리타스 쾰른 지부장이었던 Prälat Dr. Koenen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는 당시 독일 사회가 미처 관심을 두지 못 했던 외국 이민자 그룹에 관심을 두어 한국인 뿐 아니라 이탈리아, 포르투갈, 크로아티아, 그리스인들이 전담 사제를 초청해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또 사회 복지사를 고용해 이들이 독일 사회 적응하는 것을 돕도록 길을 터놓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1970년 6월 독일 주교회의로부터 제1대 공식 한인 사목자로 임명된 박영규 바르나바 신부가 쾰른 대성당 옆의 An der Linde 5번지의 쾰른 교구 사제관에 도착하면서 현재의 한인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쾰른 한인 천주교회는 1990년 대에 뒤셀도르프 지역에 한국 상사가 대거 진출하여 상사 주재원 가족과 유학생들이 합류하며 그 바탕을 확고히 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꾸르실료, 레지오 마리에, 성령기도회 등 신심단체가 생겨나고 쾰른, 본, 뒤셀도르프, 아헨, 화란 공동체 등 5개 지역 공동체로 확장되면서 신자수도 1000명을 상회하는 규모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후 2005년까지 35년 간은 주임 신부가 격주로 각 지역공동체를 순회하며 미사를 집전하는 형태 이었으나 제 11대 박용근 베드로 신부님 재임 기간 중인 2005년에 현재의 Langenfeld 소재 Christus-König 성당으로 이전하며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면서, 독일 공동체와 공동으로 사용 하기는 하지만, 자체 성당과 사제관을 갖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초창기 몇 대를 제외하고는 청주교구에서 4~5년 임기로 파견되는 사제들이 사목을 담당하고 있으며, 2020년 현재 사목지역은 쾰른, 뒤셀도르프, 본, 아헨의 4개 지역으로, 총 22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2008년에 쾰른 교구소속 종신부제로 서품된 신경수 베드로 부제가 2010년부터 한인 공동체 소속으로 부임하여 독일 교구와의 원활한 소통과 교류를 돕고 있습니다.
쾰른 한인 공동체는 매주일 11시에 주일미사를 봉헌하며, 수, 목, 금요일에 평일 미사가 그리고 격주로 토요일에 아헨과 본 지역에 공소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코로나 격리 지침에 따라 미사 참석자 수를 제한하기 위해서 11시와 16시에 주일 미사를 드립니다. (홈페이지: www.kakoka.de / 이메일: koreanseelsorge@hanmail.net)
한인 근로자들이 독일에 오게 된 계기와 방법은 실로 다양합니다.
독일 교회와 기관들 그리고 수 많은 은인들의 도움으로 다리가 놓아지고 씨앗이 뿌려지고 나무가 자라나서 이제 50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기에 우리가 독일교회와 기관들 그리고 수 많은 은인들로부터 받았던 다양한 형태의 도움들을 돌아보면, 그 도움들은 그들이 우리 한인 근로자들을 위해서 특별하게 했던 지원이나 도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독일 교회와 기관들 그리고 수 많은 은인들이 그리스도 정신에 따라 평소에 실천하던 “이웃 사랑”을 꼭 필요했던 시기에 우리가 마침 받았던 것에 불과 합니다. 그들은 독일 교회가 실시하는 사회복지의 기본 정신인 “공동선을 위한 연대정신( Solidarität für Gemeinwohl”을 평소대로 실천한 것이고 우리는 그 도움을 받은 셈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고통 받는 이들의 어려움을 나누어 지는 공동선을 위한 연대는 우리가 추구하는 이웃사랑의 출발이며 참 그리스도 공동체의 모습이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리라고 생각 합니다. 이제 우리 쾰른 한인 천주교회는 50년에 걸맞는 모습으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서 등불이 되어주는 새로운 50년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2020년 6월 19일, 1175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