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월초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을 써 붙인 대갓집 문을 예술화한 서예가 메일로 들어와 랩톱 화면에 떴다. 나는 발송인에게 “아직 한겨울인데 성급하게 무슨 입춘이냐?”고 답장을 보냈다. 달력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나는 봄은 봄기운을 피부로 느끼는 것으로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창문을 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먼 곳에서 오고 있는 봄은 아직 낌새조차 없었다. 봄을 기다리던 평화스런 2020년 2월 말의 토요일 오후였다.
그러더니 아니나 다를까 며칠이 지나기 바쁘게 양지 바른 정원구석마다 봄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흰 눈 초롱꽃이 피고 뒤이어 크로코스가 뾰족뾰족 땅속에서 기어 나오더니 어느새 노란 꽃이 정원을 덮었다. 언제나 조금 느린 보라색과 흰색 크로코스가 뒤를 이을 것이다. 입춘의 나팔소리를 뒤따라 일어난 일이다.
이런 계절의 변화를 의식하며 살게 된 것도 불과 몇 년 전이다. 새로운 비루스 균이 비행기를 타고 지구의 반을 날아와 유럽에 안착했다는 소식에 이어 독일에서 첫 감염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고 있을 때다. 거대한 중국나라 우한이라는 시장 통에서 발생 했다는데, “이게 무슨 감기독감인가?”하며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비루스 균은 이미 시간을 다투어 지구위로 번졌다. 의미심장한 ‘중국산비루스’라는 보고다.
그동안 즐긴 정년은퇴자의 느슨해진 내적 평화를 쉽게 파괴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아침저녁으로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는 전염병이 심상치 않다는 불안이 은연중에 온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반백년의 직업전선에서 그 많은 병균과 접촉이 있었지만 용케 잘 빠져나온 나였는데, 자부하고 지낸 일이었지만 이젠 할 수 없는 일이다.
해마다 초여름이면 시작하는 설사병이나 가을이 짙어 가면 시작하는 독감을 나의 훈련된 면역 방어 작전으로 피해 나왔지만 이번만은 만만하지 않은 독감이란다. 이제는 퇴직자로 무장할 의무가 없음에도 긴장된 근무 당시의 스트레스가 뇌리에 자리를 잡고 쳐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이집에 와서 산제가 어언 10년, 즐기려는 봄기운과 함께 묻어온 비루스다.
그렇게 시작한 이 중국산 비루스가 끈질기게 떠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2년 전의 입춘대길의 그 봄이 새삼 그리워진다. 온 세계가 비루스로 죽은 시체 처리와 감염 루트를 막는 일에 정신없는데 비루스 본산지와 동맹국인 러시아에서는 전쟁준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비루스로 죽어간 사체로 지친 유럽인들에게 파국적인 판데믹이 끝나기도 전에 전쟁의 전조가 봄바람에 실려 뒤따라오고 있었다.
2
혼자 산책길을 나섰다. 숲속의 새봄은 천천히 온다. 크게 자란 느도포도 나무들이 햇살을 차단하여 열었던 땅속에서 새싹들이 떨고 있다. 빈터의 늪지대는 아직도 마른 풀로 덮여 있고 지나가는 매서운 찬바람이 얼었던 대지를 박차고 나오던 어린 새싹들을 도사리게 한다.
백양나무가 즐비한 숲길에 들어서는데 한 젊은 여자가 손 붕소기계로 크게 자란 자작나무 허리춤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체 그녀는 딱딱한 백양나무둥치에 매달려 있었다. 한겨울동안 그 곳에서 봄을 기다린 나무 옆구리에 드릴로 구멍을 뚫는 모습은 참으로 잔인해 보였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하던 일을 멈춘 여자가 돌아보았다. 중년의 여자였다.
한눈에 들어온 병색의 얼굴이 나를 주춤하게 했다.
“새봄의 백양나무즙은 생명을 구하지요.” 묻지도 않았는데 말을 꺼냈다.
나는 그녀의 일을 중단시켰다는 민망함을 감추며 고개를 끄떡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나무 아래 바위에 붕소기계를 내려놓으며 걸터앉았다.
이제 날씨가 따뜻해지는 대로 백양나무는 가지 끝에 새잎이 자라게 하기 위해 땅속의 물기를 빨아올리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란다. 나무뿌리는 여과된 깨끗한 지하수를 흡수하여 굵은 나무 몸통 속의 섬세한 나무 물줄기를 통해 높게 자란 나무 꼭대기 실가지까지 끌어올려 햇살의 온기가 합세하여 광합성 작업이 시작되고 푸른 새싹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붕소기계가 뚫은 구멍 속에 투명한 플라스틱 호수 관을 꼽아서 나무 옆에 기대어 세운 병에 연결시켜 놓으면 나무즙이 흘러들어간다. 이제부터는 매일 와서 병에 모이는 나무즙을 채집하면 된다고. 그녀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피로한 엷은 웃음을 보였다. 이 나무즙이 대학병원의 명의도 고치지 못한 자신의 중병을 고쳐주었단다.
이제 3월 중순이면 활발하게 구명의 생명수가 뿌리를 통해 장치한 병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모일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나무즙을 어떻게 복용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처음으로 얼굴 가득하게 미소를 담았다. 핏기 없는 회색 얼굴에 화기다 돌았다.
아침마다 한잔씩 마시고 오래되어 색깔이 변하면 목욕물에 섞고 샴푸대용으로 머리를 감는다고 했다.
그녀가 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많은 나무즙의 수확을 얻기 바란다는 인사말로 작별을 했다. 그녀가 다시 나를 붙들었다. 한 달 후쯤에 여기서 다시 만나서 백양나무즙을 채취하고 자기 집으로 가서 나무즙을 함께 마시잔다.
“그렇게 애써서 얻은 나무즙을 제게 준다고요?”
“자연에서 얻은 게 아닙니까! 나누어 마셔야지요!”
“약속을 하지 않아도 우연으로 이루어지겠지요! 감사합니다.”
나의 대답이 매정하고 비인간적이라고 스스로 느끼면서 다시 산책길을 떠났다.
3
3월 중순에 눈비가 내렸다. 자두나무의 가지에 터져 나오던 싹이 다시 움츠리고 몇 송이의 흰 색 코르코스가 떨면서 피기를 멈추었다.
다시 혼자 산책길에 나섰다.
그동안 봄이 들어와서 숲속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찬 땅속에서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태양을 부르며 새싹들이 나오고 있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느끼며, 그동안 잊었던 백양나무숲을 향해 걸었다.
나무 밑의 바위위에 앉아있던 여자가 나를 보고 기다렸다는 말로 반갑게 인사를 하며 일어섰다. 올 때 마다 혹시나 하고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얼굴이 더 수척해져 있었다. 나는 우선 나무즙을 얼마나 채취했는지 물었다. 그녀는 실망한 얼굴로 한 방울도 채취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친구로 말을 놓자며 손가락을 걸었다. 그녀 이름은 다리아, 꽃 이름 달리아를 연상하는 이름이지만 그녀얼굴은 달리아 꽃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라 내심 어울리지 않는 이름라고 생각했다.
“다리라고 불러 줘! 나의 옛 친구들이 그렇게 불렀어.”
“처음 듣는 이름인데?”
“우크라이나 이름이야, 오데사가 내 고향이야”
나는 오후에 시내에 가야한다는 핑계로 다시 만날 약속도 거절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몇 번이고 우연히 만나다보면 우정이 깊어갈 지도 모른다. 이런 만남도 기회로 붙들어 친구의 끈을 돈독하게 해야 하겠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다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그녀는 자신의 신상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녀의 병력을 듣게 될 것이다.
반세기 간호사로 일한 경력이 내 몸에서 풍겨나와 그녀를 감싸게 되면 나에게 매달리며 심신의 간호를 요구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치며 숲길을 걸었다.
4
코로나비루스는 기하급수로 전 지구를 광역으로 판데믹 잔치를 벌였다. 숨어살던 비루스가 번성하여 동물 매체를 거처 인간 세상으로 건너뛰었다고 한다. 국경을 넘나들며 인간을 차별하지 않고, 빈부나 지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 생명을 빼앗는 작업을 시작했다. 너희 인간의 목숨이나 우리 비루스 미생물이나 지구위의 존재 이유는 동등하다고 외치듯이.
인간사회는 숫자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비루스와의 투쟁을 시작했다.
예방접종과 방역대책으로 퇴치하여 이길 것이라고 자부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비루스 균에 대해서는 모르는 점이 많다고 발표하여 불안을 조성했다. 전 세계에 백만이 넘는 환자가 기록되고 엄청난 숫자의 사망자를 냈다.
첫 백신주사를 맞을 때 두 번째 백신주사 맞아야 한다고 했고 일 년도 지나지 않아서 세 번째 백신주사기의 아픔과 함께 네 번째 주사를 맞아야한다는 경고를 받았다. 비루스는 예방접종으로 방어하는 인간사회를 대항하는 자세로 변이를 계속하며 쉽게 물려 서지 않겠다는 기세를 보였다.
그런지 벌써 3년째 접어들었다. 70%의 군중면역성도 감염 예방을 보장 할 수 없다며 계속 조심하라는 방역대책으로 마스크를 쓰는 의무제가 실시되었다. 네 번째 백신주사를 맞으러 갔다. 주사기를 든 의사가 어차피 한번은 코로나에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군중면역(Herdeimmunitaet)은 기대할 수가 없다면서. 독일의 백오십만 명의 백신 거부자들은 비루스가 계속 살 수 있는 호스트가 되어 비루스의 생존 조건을 보장하는 현실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무도 언제 끝날 것이라는 예언을 못한다. 올가을에는 새로운 변이성 비루스가 힘을 잃어가는 전임자를 대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코로나와 함께>라는 슬로건을 걸고 해마다 겨울이면 찾아드는 감기처럼 대하자고 한다. 독일인들은 감기는 치료하면 일주일 후에 낫고 치료하지 않고 기다리면 7일 후에 낫는다고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인데 코로나는 그렇지 않다. ‘롱 코로나’라는 이름을 단 장기 증상은 비루스가 환자의 몸을 떠난 후에도 증상이 남아 노동력이 감소된다니 노병을 가진 연장자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시시각각으로 늘어나는 비루스환자의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다. 발달한 전자공학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계산해 내는 인간이 비루스 숫자는 추적을 하지 못한다.
5
다리아를 만나기 위해 자작나무 숲으로 갔다.
“…..혼자 사시는가요?”
애잔함이 담긴 이 짧은 질문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녀는 큰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려다가 병고로 지친 그녀에게 더한 외로움을 줄 것 같아 어물거리자, 남편이 그녀를 버리고 떠난 후 같이 살 사람을 구하고 있다고 말을 이었다.
“같이 살 사람이라 말했지만 같이 생활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한 집에 살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화장실 입구에서 만나 서로 아침인사를 하고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싶어요.”
그녀는 다시 작은 바위 위에 앉았다. 륙색에서 물병을 내어 몇 모금 마신 후에 잠시 눈을 감는 그녀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떠나간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로 다시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병든 여자를 혼자 두고 떠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은 아니다. 그녀가 여덟 살 된 딸을 데리고 그 남자와 재혼을 했을 때는 어둠속에 살던 자신에게 세상을 향한 문이 다시 열렸다고 생각했단다.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
1267호 14면, 2022년 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