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예술테마로 한 노년에 더욱 빛나는 창조의 거장들
헤르만 하인들 화백(Hermann Haindl 1927-2013),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
예술이 인생의 전부였던 원로 하인들, 작가가 일생동안 열정을 쏟은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예술은 나의 창조이고 내가 결정한다. 처음부터 완성하기 까지 개인적인 창조다.” 라고 그는 말한다. 예술이 있기에 그는 살아갈 수 있었다.
언젠가 타우누스 바드소덴에 위치한 ‘스타트’ 갤러리에서 85세 하인들 화백의 생신을 축하하는 작품전이 열렸다. 개막식에는 200여명의 많은 관객들이 방문해서 일생동안 예술을 위해서 산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축하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원색의 빨강, 검정, 초록, 노랑등 정리가 안 된 것처럼 보이는 강렬한 색들의 배경으로 거대한 고목들이 가득한 추상화 작품들은 울창한 숲의 정경이 펼쳐졌다.
오래된 고목들은 줄기가 사방으로 뻗혀 꿈틀거리는 뜨거운 열기로 생명의 숨결이 들리는 것 같았다. 원색들의 난무는 참혹한 전쟁에서 본 불안, 공포 등 지나간 기억 속에 기록된 회고전이라고 하인들 원로작가는 작품의 배경 이야기를 설명했다. “인간의 행위는 축적된 기억과 컨트롤 할 수 없는 기억에 의해 이루어진다.” 라고 한 누군가 쓴 글이 생각난다.
하인들 원로작가는 젊은 시절 전쟁에서 죽음과 삶 사이를 넘나들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불타버린 나무밑 줄기에서 살아있는 생명을 발견했다. 나무의 끈질긴 생명에 매료되어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열정과 집념으로 그렇게 시작한 나무그림은 일생동안 그의 작품 모티브가 되었고 삶의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제는 마지막 목표로 산다는 예술을 위해 일생을 바친 원로 작가의 얼굴에서 젊은 시절 불안과 공포로 지냈던 전쟁의 아픈 기억에서 해방 되여 노년의 고요한 평화스런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하인들 원로 작가는 방문한 관객들에게 그리고 오늘이 있기까지 항상 곁에서 힘과 용기를 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하다 라고 했다.
예술이 인생의 전부였던 원로 하인들 작가가 일생동안 열정을 쏟은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예술은 나의 창조이고 내가 결정한다. 처음부터 완성하기까지 개인적인 창조다.” 라고 그는 말한다. 예술이 있기에 그는 살아갈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예술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도 예술이다.(Alles ist Kunst oder nichts ist Kunst.)” – 오브젝트 예술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하인들 원로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
하인들 작가는 1927년 베를린 카토위츠(Kattowitz)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대장치미술가였고 어머니는 성악가로. 부모 모두가 예술가였다. 그는 14세에 학교를 마치고 1942-1944년 카토위츠예술학교에서 연극무대장치미술을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그의 나이 17세에 군복무 했다. 당시. 그는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보았다. 거리마다 시체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거리의 건물들은 불타 잿더미로 변했다. 하늘은 연기와 불길로 휩싸였고. 감수성이 예민한 하인들은 불안과 공포로 견딜 수 가없었다.
그는 러시아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보았다. 불타버린 나무뿌리에서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을, 생명의 신비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나무들을 정신없이 스케치했다 사진처럼 리얼하게 그린 나무 스케치를 본 러시아 장교는 탁월한 그의 재능에 감탄했다. 장교는 하인들이 나무그림들을 계속 그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러시아의 혹독한 강한 추위로 인한 심한 발 동상에 걸려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 1948년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베를린 예술세계는 예전과 달랐다. 예술가들은 기존의 권위적인 나치미술에서 내면의 세계를 추구하는 자유분방한 추상화 그림들을 그렸다 초기 사실화에서 처음 현대미술을 본 하인들은 혼란스러웠다 고한다.
그는 Karl Hoter교수에게서 현대미술을 공부했다. 1949-1953년 베를린 마이스터학교에서 프랑크푸르트 스테델 야간 미술학교에서 그래픽을 공부했다. 1950년 프랑크푸르트로 옮겼다. 1950-1980년까지 연극 무대장치미술가로 활동했다. 1956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강사로 데생과 그림들을 가르쳤다. 1960년부터 점묘화, 템페라등 실험적인 기법으로 독특한 창의성으로 제작하였다.
아내 에리카와 함께 북아메리카 인디언과 신비의 나라 인도를 여행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인도 힌두교와 고대신화에 영향을 받은. 당시 그린 작품들은 몽환적인 초현실 그림들이다. 1966년 거주지인 역사적 구시가 호프하임(Hofheim) 문화재복고를 위한 예술협회 창시자가 되었다. 1973년 이스라엘(Tel Aviv) 초대전으로 대형 무대 전시실에서 가졌다. 1979년 아내 에리카 박사와 함께 문화재유산보호 책임자가 되었다. 1981년 비스바덴 헤센란드하우스에 대형작품 2점을 제작했다. 1984년 자연환경보호를 위한 데모를 하기도 했다. 1985년 호프하임에서 주는 문화상을 수상했다.
바르셀로나 출신 유명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Antoni Gaudi 1852-1926)는 건축물에 자연의 숨을 불어 넣어 숲과 바다를 연출했다. 숲과 건축이 하나가 된듯한 늘어뜨리기 기법에서 환상적인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건축형태는 곡선으로 섬세한 동물의 뼈 구조로 되어있고 피부처럼 표면을 처리했다.
가우디는 일생동안 바르셀로나 가우디의 건축물에 자연의 예술품을 만들다가 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지 100년이 되는 2026년 미완성인, 세계에서 가장 예술적이고 웅장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걸작품이 완성된다.
2019년 7월 12일, 1130호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