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야기-(15)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했던 구호사업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위한 빈민구호(Distress Relief)와 실업자들을 위한 취업구호(Work Relief), 빚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부채구호(Debt Relief)로 진행했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빈민구호는 창고에 쌓여있는 식량과 제품을 정부가 싼 가격으로 구입해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이었고, 경제회복은 4만 km2의 면화를 뽑아서 버리면서, 60만 마리의 돼지를 도살해 없애는 방법으로 과잉재배와 과잉생산을 막아 가격을 조절하는 일이었다. 실업자 구제를 위해서는 1만km의 지방도로와 5천800개의 간이도서관, 3천300개의 댐 건설, 1천600개의 의료시설, 1천600개의 학교건물, 100개가 넘는 비행장 건설 등 어마어마한 공사를 실업자를 줄이기 위해서 무작정 시작했다. 이때 했던 댐 건설로 자연이 많이 파괴되었다는 비판은 지금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국토개발공사의 일환으로 ‘테네시 계곡’의 개발공사를 시작했고, 노인과 극빈자를 위한 정책과 노동조합을 보호하는 정책 등 전국적으로 골고루 발전시켜 모든 사람이 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데 노력했다. 자유방임에서 탈피해 정부의 감독아래 생산량, 가격, 임금 등을 통제했으며, 미성년자의 노동금지와 임금착취를 감시했다. 이 모든 것들을 대통령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했다.

이 뉴딜정책은 시작한지 3년 만인 1936년에 이미 국민소득 825달러로 끌어올렸고, 실업률 16,9%로 성공해, 대 공항 전 수준으로 좋아진 듯했으나, 이상하게도 4년째부터(1937) 다시 불경기가 시작되더니 점점 심해져 1939년까지 곤두박질을 쳤다. 뉴딜정책은 깜작 효과만 나타낸 후, 바로 종착역에 와버린 꼴이었다.

조금만 더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다면 ‘대 공항’과 맞먹는 몰락이 미국을 덮쳐 또다시 거지가 될 뻔 했지만, 운이 좋아서였는지 하늘이 도와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미국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천우신조의 기회가 찾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의 불행(전쟁)은 나의 행복(미국의 돈벌이)으로 연결되어 엄청나게 많은 군수물자를 필요로 하는 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은 다시 호경기를 맞게 되었고, 미국의 실업자문제와 생산과잉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게 되었다.

뉴딜정책을 두고 여론은 찬반 두 가지로 갈렸다. 반 기업, 반 시장은 나쁜 거라고 비판하는 여론과, 대기업, 큰 은행의 착취는 사악한 것이었고, 뉴딜정책은 대단히 잘된 정책이었다고 주장하는 여론으로 갈렸다. 실제로 뉴딜정책 때 갈라놓았던 작은 은행들이 견디지 못하고 파산이 줄을 이었고, 그걸 막느라 천문학적인 세금이 들었다. 경기침체는 과다경쟁에서 왔으며, 가격인하를 유도했던 정부정책은 소작농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결국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만 더욱 키웠다는 불만이 높았다.

‘테네시 계곡의 개발공사’는 쓸데없는 댐 공사로 자연을 파괴했다는 비난이 무성했고, 정부가 지나치게 노동단체를 도와주는 바람에 임금이 생산성을 앞질러, 그로 인해 신규채용이 줄었으며, 이는 다시 실업증가로 연결되었고 소비감소로까지 이어졌다는 비난까지 겹쳤다. 정부의 정책이 기업에 기울면 노동자가 죽게 되고, 노동자에 치우치면 기업이 허덕인다. 그래서 절묘한 정책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참 어려운 일이었다.

루스벨트가 제32대 대통령에 취임하던 해에, 히틀러는 독일의 ‘독재자’가 되었다. 그는 1938년 라인란트 지방을 점령한 후, 일방적으로 베르사유조약을 파기하고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했다. 이태리의 독재자 무솔리니(1883-1945),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등 세 나라가 동맹을 맺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 전쟁으로 미국이 살아났고, 루스벨트도 다시 살아나 대통령을 4번이나 연임하는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와 함께 스페인 내전에 개입해 프랑코 정권을 세우는 일에 참여했고,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다음, 체코에 독일인이 많이 살고 있으니, 독일 땅이나 다름없다며 체코를 점령해 버렸다. 이런 저런 사정을 영국과 프랑스는 구경만 하고 있었고, 이에 용기를 얻은 히틀러는 어느 날 통고 없이 폴란드를 기습(1939)했다. 그제야 심각함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6년 동안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무려 5.300백만여 명이 사망했다. 참으로 참담한 전쟁이었다. 당시 미국은 세계전쟁에 참여할 형편이 못되었다. 미국국민들이 자칫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제위기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우선 이민법과 관세법의 벽을 높이면서 자기 자신들 살기에 바빴다.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에 팔고 있는 무기와 상품은 철저하게 현금거래만을 고집했다. 그 이유는 1차 세계대전 때 여러 나라에 빌려준 돈이 제대로 회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막대한 미국자본이 이미 해외투자로 나가있었고, 외국과 폭넓은 상거래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전개되는 국제정세는 미국을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1937년 양자강에서 일본 전투기가 미국군함을 격침했을 때도 250만 불의 보상금만 받고 참으면서 전쟁만은 피했다. 2차대전이 시작된 1939년의 미국은 불황에 허덕이고 있었고, 여론은 전쟁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루스벨트는 1940년 대통령선거(3선)에 다시 도전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전쟁을 시작한지 27개월이나 지났지만, 미국은 긴 세월을 억지로 참고 또 참았다.

세 번째 대통령 취임사에서 루스벨트는 언론의 자유, 가난으로부터 자유, 종교의 자유 그리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천명했다. 한편 히틀러는 1940년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차례로 점령한 후, 벨기에 네덜란드까지 간단하게 먹어 치웠다. 이 모든 일들을 18일 동안에 전광석화처럼 해냈고, 6월엔 파리에 입성했다. 히틀러(1889-1945)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이웃나라들을 짓밟았고, 그의 앞에서 유럽의 나라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이제 남은 건 영국뿐이었으나, 의외로 완강하게 저항하는 영국과 매일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국은 영국이 무너지면, 다음은 자신들 차례일거라고 대강 짐작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온 힘을 다해 영국을 도왔다. 물론 돈을 받고 하는 상거래였지만, 이에 격분한 독일은 1941년 5월, 독일잠수함을 동원해 미국 배를 침몰시켰다. 미국은 ‘국가위기상황’을 선포하면서도 전쟁선포는 하지 않고 참았다. 1941년 6월 히틀러는 소련침공을 시작했고, 10월에는 또다시 독일잠수함을 동원해 연속적으로 두 번씩이나 미 군함과 미 구축함을 격침시켰지만, 미국은 참고 또 참기를 거듭하면서 전쟁을 피했다.

1941년 일본의 가미카제가 하와이(진주만)를 공격하자, 마침내 미국의 분노가 폭발했다. 두 달 후인,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일본은 아직 잠을 자고 있던 진주만의 미군태평양함대를 공격해 전함 19척을 박살내고, 2400여 명의 해군이 죽었고, 149대의 전투기도 힘 한번 쓰지 못하고 허망하게 태평양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으며, 필리핀 마닐라에서도 미 항공부대가 일본군의 기습으로 무너졌다. 다음날 미국의회는 부랴부랴 전쟁을 승인했고, 12월엔 독일과 이태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당사국명단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렸다.

* 참조 : 먼 나라 이웃나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참조

2019년 10월 10일, 1142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