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속에서의 독립운동을 찾아 (1)

3.1 운동으로 독일로 망명한 이미륵 박사

교포신문사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아, “독일 속의 독립운동을 찾아”라는 제목으로 기획기사를 10월 한 달 총 4회 연재한다.   “독일 속의 독립운동을 찾아” 기획기사는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독일 및 유럽 동포언론을 망라해서도 최초로 시도하는 기획기사로서, 100년전 독일에 거주했던 한인들이 조국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도 함께 조망해 본다.  -편집자 주

3.1운동 당시,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3·1 운동에 대한 보도가 활발히 이뤄진 등과 달리 독일에서는 3.운동에 대한 기사가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당시 수도 베를린에 기반을 둔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Deutsche Allgemeine Zeitung)의 “한국의 소요사태는 진압됐다. 그곳은 다시 평온하게 됐다”는 내용의 단신 깃가가 전부이다.

제목도 없는 단 두 줄짜리 기사는 3·1 운동이 일어난 지 21일이 지난 후인 1919년 3월 22일자에 보도됐다. 그것도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런던특파원이 3월 9일자 도쿄발 로이터 통신을 인용한 기사였다.

이렇듯 독일정부나 일반인들은 식민지 국가로 전락한 당시 한국에 대해 그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한 재독한인들의 활동을 베를린, 포츠담 뷔르츠부르크 뮌헨 등지에서 찾아볼 수가 있었다.

3.1 운동으로 독일로 망명한 이미륵 박사

독일에서의 한인 역사를 이야기 할 때에는 언제나 이미륵 박사의 이야기로 시작하게 된다.

본명이 이의경인 이미륵박사는 경성의전 3학년 때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경의 추적에 못 이겨 끝내는 밀선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도망친다. 그후 약 6개월간 여권을 얻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임시 정부의 일을 돌보기도 하였으며 중국 여권을 얻은 후 독일로 망명을 갔다. 당시 상해에서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봉근과 함께 배를 타고 1920년 5월 프랑스 마르세이항에 도착한다. 두 사람은 독일 베네딕트회 Wilhelm신부의 도움으로 독일로 망명 한다.(안봉근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독일에 도착한 이미륵 박사는 뷔르츠부르크 인군 뮌스터 슈바르차하라는 수도원에 도착(1920년 5월 26일), 8개월간 그곳에 머무르면서 독일어 공부에 열중했다.

다음 해 1월부터는 뷔르츠브르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의학 공부를 하다가 1923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겼다. 1925년부터 뮌헨대학에서 동물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26년에는 외국인 학생회장도 지내고, 1927년 7월 28일에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덕고려학우회> 창설 주도 및 “세계압박민족 결의 대회” 참가

1921년 1월 1일 이미륵 박사와 이극로, 김갑수 등의 주도로 베를린에서 유럽 최초의 유학생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가 결성되었다. 설립 목적은 학생 자체의 발전과 친목을 도모하고 한인의 자치와 외교에 관한 활동을 주관하기 위함이었다. 유덕고려학우회는 구제활동·임정지원활동·대외선전활동·국제대회 참가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 외에도 유덕고려학우회는 포츠담에서 매년 8월 29일을 국치일로 삼아 기념식을 갖고 나라 잃은 아픔과 독립의 의지를 되새겼고, 매주 강연 또는 토론회를 열었다.

1927년 2월 5일 10일간의 일정으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처음으로 피압박민족대회가 개최되었다.

한국을 대표하여 한국대표단은 단장으로는 이극로, 독일대표 이미륵, 황우일, 프랑스 대표로 김법린, 그리고 때마침 유럽을 여행 중이던 허헌(후일 북한 부수상)을 신문기자 대표로 선정하여 참가했다. 이들은 피압박민족대회에 제출할 안건으로 “하관조약(下關條約)을 실행하여 조선 독립을 확보할 것”, “조선의 총독정치를 즉시 철폐할 것”, 그리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의 세 가지를 준비하였다.

피압박민족대회에서 한국대표단의 활약상과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 반제국주의운동과 피압박 민족 및 계급에 대한 동정적인 인식이 확산되는 때에 피압박민족대회를 기회로 삼아 국제사회에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고발한 것은 높이 평가되는 활동이었다. 특히 한국대표단이 체계적으로 준비한 『한국문제』를 각국 대표와 신문기자, 그리고 대회 참가자들에게 배포한 것은 유럽사회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반 나치운동 등 뜨거운 인간애를 실천한 사람

2차대전 당시 반나치 비밀지하조직인 ‘백장미’라는 저항단체가 있었다. 1943년 2월 17일 뮌헨대 학생이던 한스 숄과 소피 숄 남매는 뮌헨대학교 광장에서 백장미의 반나치 유인물을 뿌렸다. 결국 남매는 2월 22일에 처형됐다. 그때 뮌헨대 총장이던 후버 교수도 함께 처형됐다.

이미륵 연구에 일생을 바친 정규화 박사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장미 사건으로 투옥, 사형당한 숄 남매를 이미륵 박사가 면회한 사실은 아직까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투옥된 뮌헨대 총장 쿠르트 후버 박사를 면회 가서 식료품을 전하고 가족들을 찾아가서 남매의 교육문제를 상의하고 위로하신 건 사실입니다.”(이미륵 박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나치 독재정권이 악명을 떨치던 암흑의 시대에 독일 전 지역에 전단지를 뿌리며 독재국가에 저항했던 이들을 이미륵은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륵, 그는 뜨거운 인간애를 실천한 사람이었고, 완전한 작가이자 한 인간이었다.

2019년 5월 28일 그레펠핑 시 후버 광장에는 왼쪽 담벾에는 후버 교수 동판이, 그리고 오른 편 담벾에는 이의경 동판이 부착되어 사후에도 두 사람의 사상적, 학문적, 인간적인 우정이 지속되고 있다. 2019년 5월 28일 주 프랑크푸르트 금창록 총영사와 그레필핑 시장이 동판부착식을 지켜보았다.(편집실)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019년 10월 4일, 1141호 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