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500주기를 맞는, 르네상스의 회화를 이끈 젊은 천재, 라파엘로
지난해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500주기였다면 올해는 라파엘로 500주기다.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 3대 화가로 꼽히는 라파엘로는 트로이카 가운데 가장 젊었다. 레오나르도보다 서른한 살, 미켈란젤로보다 여덟 살 어렸다. 두 선배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구김살 없는 성정으로 타고난 천재성을 맘껏 꽃피웠다. 레오나르도의 인물묘사법을 발전시킨 수많은 성모자화와 미켈란젤로의 스토리텔링 기법을 계승한 ‘아테네 학당’ ‘갈라테이아의 승리’가 대표작이다.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봐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 그의 죽음으로 자연마저 죽을까 봐 두려움에 떨게 만들다.” 서른일곱 살에 요절해 로마 판테온에 묻힌 그의 묘지명이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생일인 4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는 고독을 즐겼던 다빈치, 괴팍하고 고집이 강했던 미켈란젤로와는 달리 뛰어난 외모를 가졌으며 사교성과 예의도 좋았기에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조각, 그림, 건축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반면, 라파엘로는 회화에 치중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그의 회화 작품은 특유의 섬세한 기법을 통해 절재의 미덕과 조화·균형 등을 담아내며 르네상스의 회화를 이끌었다.
라파엘로는 화가 집안에서 태어났던 덕분에 어릴 적부터 미술을 접할 수 있었다. 이후 피에트로 페루지노라는 스승을 만나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었고, 정교한 페루지노의 화풍은 라파엘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481~82년에 페루지노가 로마 바티칸 궁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린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는 라파엘로의 첫번째 주요 작품인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식 The Marriage of the Virgin〉(1504)에 영감을 주었다. 페루지노의 영향은 원근법 강조, 인물과 건축물 사이의 점층적 관계, 서정적으로 감미롭게 묘사된 인물 등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초기 그림에서도 이미 라파엘로의 감성은 스승의 감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건축물과 관련된 인물의 배치는 페루지노보다 덜 엄격하며,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각 인물의 배치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활기에 차 있다.
라파엘로가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식〉을 그린 직후에 완성한 3점의 소품 〈기사의 꿈 Vision of a Knight〉·〈3가지 은총 Three Graces〉·〈성 미카엘 St. Michael〉은 젊은 참신함만이 아니라 자신의 표현양식을 이루는 요소들을 다루는 능력이 완전히 무르익은 것을 보여주는 서술적 그림의 빼어난 본보기들이다. 페루지노한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1504년말이 되자 라파엘로는 모범으로 삼을 다른 모델을 찾아야겠다고 느꼈고 지식에 대한 욕망으로 페루자 밖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후 피렌체로 떠난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에게 많은 영감을 얻는다. 그들의 장점을 취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 라파엘로는 율리우스 2세에 의해 바티칸 교황청으로 불려가 여러 작업을 맡게 된다. 바티칸에 있던 시기인 27세 때에는 라파엘로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아테네 학당’을 그린다.
바티칸궁 장식화의 용도로 제작된 아테네 학당은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8m의 길이의 거대한 벽화이다. 그림은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학자들을 1점 투시도법으로 묘사했는데 약 5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중앙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주 보며 걸어오고 주변에도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등 당대 걸출한 학자들이 등장한다.
재미있는 점은 플라톤은 다빈치를 모델로, 계단에 기댄 채, 사색에 잠긴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의 모습을 모델로 그렸다는 점이다. 또한 검은 모자를 쓰는 청년은 라파엘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라파엘로의 독특한 원근법과 치밀한 조화의 기법은 웅장하고 우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라파엘로는 여러 스케치로 치밀한 밑작업을 했으며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르네상스의 사상을 널리 알린 걸작이 된다.
라파엘로는 또 다양한 초상화를 남겼다. 자신의 자화상은 물론, 율리우스 2세 교황과 당시 여러 나라의 여왕, 귀부인을 그렸는데 세밀한 묘사와 색조가 오늘날 역사 연구가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라파엘로의 친구이자 유명 작가였던 ‘발타자르 카스틸리오네’를 그린 그림은 특히 유명한 초상화이다. 미묘한 색조 차이를 보이도록 색채를 제한하면서도 정밀하고 섬세한 세부 묘사로 표현했다. 라파엘로의 이런 독자적인 기법의 초상화들은 렘브란트, 티치아노 등 후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라파엘로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이다. 후에 클레멘스 7세 교황이 된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이 나르본 성당으로 보낼 생각으로 의뢰했다고 한다. 그림은 부활한 예수의 등장을 그린 것으로 인물의 표현이 고대 조각을 연상시키는 볼륨감과 명암을 아주 섬세하게 드러내준다.
라파엘로는 교황청의 건축, 회화 장식 등 미술 분야의 감독 책임자로 활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라파엘로가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만큼의 평가를 받지는 못했으나, 짧은 생애에 많은 걸작을 남긴 그가 미술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며,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적 규범으로 받들어졌다.
37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아가며 라파엘로는 르네상스를 이끈 서양 미술사의 거장으로 등극했다. 또한 렘브란트, 루벤스, 들라크루아 등 유명한 후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선구자로 남기도 했다.(편집실)
사진1: 아테네 학당
사진2: 갈라테아의 승리
2020년 1월 17일, 1154호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