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기억해야 할 인물 (6)

탄생 200년 맞는 엥겔스

올해 탄생 200주년(11월 28일)을 맞는 엥겔스는 두 살 연상의 마르크스와 ‘공산당선언’을 공동집필했다. 또 영국 맨체스터에 있던 아버지의 방직공장을 물려받아 운영하면서 마르크스의 영국 망명생활을 도와 마르크스의 최후 저작 ‘자본론’이 빛을 보게 했다. 그런 점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폴 앨런, 애플의 스티븐 워즈니악에 비견될 인물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카를 마르크스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상적 동지다. 엥겔스가 없었다면 마르크스는 그 엄청난 이론적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며, 마르크스가 없었더라면 엥겔스는 한 세기를 휩쓴 정치운동의 상징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자본가로 살면서 자본주의 타도운동에 앞장선 엥겔스.

아마도 엥겔스는 자본가로 살면서 자본주의 타도운동을 지도했던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그는 독일 라인란트 지방 부퍼탈에서 방적공장을 운영하는 산업 자본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가 영국 맨체스터에 동업자와 함께 세운 공장을 맡아 운영했다. 동시에 엥겔스는 상류층의 스포츠인 여우사냥을 다니고 최고급 포도주를 즐겨 마시고 매력적인 여성들과 어울리며 인생의 온갖 즐거움을 탐하는 전형적인 유복한 부르주아의 삶을 산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엥겔스는 부르주아 결혼제도를 거부한 사람이기도 했다. 아일랜드 노동자계급 출신의 메리 번스와 20여년 동안 동거했으며, 메리가 죽자 그 여동생 리지 번스와 다시 15년을 살았다.

엥겔스가 자본가의 삶을 산 것은 절반쯤은 아버지의 압박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엥겔스는 평생 아버지와 불화했다. 17살 때 김나지움을 자퇴한 것도 아버지가 보기에 인생에 아무 쓸모없는 ‘문학나부랭이’나 끼고 사는 것이 못마땅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엥겔스는 아버지 사업을 전수받는 일에 투입됐으나, 마음은 계속 딴 세계를 향했다.

스무살 무렵 엥겔스는 독학으로 헤겔을 공부해 청년헤겔파, 곧 반체제적 철학운동에 눈을 떴다. 1841년 프로이센군대에 입대해 베를린의 포병 근위대에 배속된 엥겔스는 1년 동안 청강생으로 베를린대학에 드나들었다.

엥겔스의 삶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마르크스라는 평생 동지를 만난 일일 것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라인신문> 편집장을 하던 1842년 우연히 신문사에 들러 장래의 인생 파트너를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싱거운 만남이었다.

그러다 1844년 여름 파리에 망명 중이던 마르크스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완전한, 되돌릴 수 없는 의기투합이었다. 이때부터 ‘제1바이올린을 보조하는 제2바이올린’의 삶이 시작됐다. 1849년 마르크스 가족이 런던에 망명한 뒤 엥겔스는 맨체스터 공장을 이어받아 20년 동안 공장주 노릇을 했다.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마르크스의 생계를 뒷받침했다.

엥겔스의 중요한 과업은 마르크스가 초고 상태로 남기고 간 <자본>의 원고들을 정리해 제2권(1885), 제3권(1894)으로 갈무리해낸 일이었다. 1889년 엥겔스는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 분파를 아울러 새로운 국제노동자협회(제2인터내셔널)를 결성했다. 제2바이올린이 마침내 제1바이올린으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엥겔스의 생애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년 11월 28일 – 1895년 8월 5일)는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경제학자로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독일 라인 주(洲)의 바르멘 시에서 1820년 11월 28일, 방적공장 경영자의 가정에서 출생하였고, 아들이 경영자가 되기를 바라는 부친의 뜻으로 김나지움을 중퇴한 후 브레멘 시의 공장에서 견습으로 근무하다가, 1841년 가을부터는 포병지원병으로 베를린에서 복무하였다. 이 기간에 베를린 대학교에서 청강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당시 사회의 개혁에 관심을 갖고 그 운동에 참가하였는데, 베를린 체류 중에 청년헤겔학파의 일원이 되었고, 또 베를린 대학 교수였던 셸링의 반동적, 신비적 철학에 대하여 「셸링과 계시」(Schelling und Offenbarung, 1842) 등 여러 논문을 통해 반박하였다. 동시에 헤겔의 보수적 결론, 그 관념론적 변증법의 모순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1842년에 아버지에 의해 그가 경영하던 영국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근무하게 되어, 당시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달하였던 영국의 노동자 계급과 접하게 되면서, 그 지독한 경제적 생활상태, 정치적 무권리의 원인 탐구에 뜻을 둠과 동시에 그 당시 전개되고 있던 차티스트 운동의 견해와 운동의 결정을 보고, 그 성과를 『정치 경제학 비판 요강』(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1844) 및 『영국에 있어서의 노동자 계급의 상태』(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 1845)를 집필하였다.

영국에서 귀국 도중에 파리에서 마르크스와 만난 후 이들의 확고한 우정과 협력이 계속되었다(1844). 이들은 우선, 1844~1846년에 걸쳐, 공동 저작 『신성가족』(Die heilige Familie)과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를 써서, 헤겔, 포이에르바하, 청년헤겔학파 등을 추종하는 자들의 철학적 견해를 비판하고, 동시에 변증법적 사적 유물론의 토대를 쌓았다. 또 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당으로 이어진 ‘공산주의 동맹’을 조직하는 등 실천적 활동을 수행하고, 그 동맹의 강령으로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을 발표하였으며, 엥겔스는 그것의 초안인 『공산주의의 원리』(Prinzipien des Kom-munismus)를 쓰기도 하였다.

1848~1849년의 독일 혁명에 적극 참가하였으나, 혁명의 실패로 다시 맨체스터의 공장으로 돌아갔다(1850~1870). 이 혁명 투쟁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독일 농민 전쟁』(Der deutsche Bauernkrieg, 1850), 『독일에 있어서의 혁명과 반혁명』(Revolution und Kontrarevolution, 1851~1852)을 쓰고,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에 있어 동맹자로서 농민이 지니는 의의를 명확히

그는 1870년에 런던으로 이주하여 마르크스와 함께 일을 하였으며, 마르크스 사후(1883)에는 『자본론』 제2~6권의 간행에 몰두하면서, 마르크스 사망 후의 유럽 국가들에 있어 노동운동의 지도적인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895년 8월 5일 식도암으로 세상을 마쳤으며 그의 유해는 그의 유지(遺志)에 따라 해저에 가라앉혀졌다.

2020년 2월 21일, 1159호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