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34)
독일의 정당(5) – CDU ①

 

독일은 ‘정당국가’라고 칭해질 정도로 정당의 법적·정치적 위상이 높은 국가이다. 이러한 정당의 높은 위상은 독일 민주주의와 나치즘의 역사, 그리고 선거와 국가체제 등 제도적 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낳은 결과이다. 세계에서 정당정치의 모범으로 칭송받는 독일정당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먼저 독일 기본법상의 정당과 정당의 역사를 살펴보았고, 연방의회에 진출한 각 정당을 창당 순서로 살펴본다.

기독교민주연합(Christlich Demokratische Union Deutschlands)

독일 기독교민주연합(독일어: Christlich Demokratische Union Deutschlands, CDU)은 1945년 결성된 중도우파 정당이다. 한국어로의 약자는 ‘기민련’이 옳다고 할 수 잇는데, 한국 언론에서는 주로 ‘기민당’ 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정당들이 항상 당명 끝에 ‘당’을 붙인 것이 영향을 끼쳤다.

정당 이름에 ‘기독교’라는 단어가 있지만, 근본주의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 민주주의, 즉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모순 없는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정치 지향으로는 중도우파 성향의 정당으로서 자유보수주의와 기독교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과거 나치 정당의 역사적 반성으로 중도우파 정당 으로서는 상당히 진보적면도 보이고 있다.

기민당(CDU)은 1945년 창당되었으며 바이에른 주에 지역적 기반을 둔 자매정당 기독교사회당(CSU, 이하 기사당)와 함께 독일 정당체제 최대의 중도우파 정당으로 기능하고 있다.

기민련은 기독사회주의, 보수주의, 자유주의의 세 가지 이념적 지향성 을 통합하고 있으며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기민련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유, 연대, 정의’의 세 가지 기본 가치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중도적 성격은 기민련의 주도 하에 도입된 ‘사회적 시장경제’ 개념에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나치정권의 중앙통제 시스템과 사민당의 계획경제 모델에 대한 비판적 관점 하에서 등장하였으며 효과 적인 사회보장을 갖춘 시장경제를 지향한다. 이러한 기민련의 온정적 보수주의와 중도적 성격은 신자유주의와 결합된 미국 공화당이나 영국 보수당의 보수주의와 차별성을 갖는다.

기민련은 초창기에는 소수의 명사와 ‘청년연대’, ‘중산층경제단체’ 등 다수의 느슨한 사회세력 집단 간의 연합체 형태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사민당의 대중정당조직 모델을 도입하고 광범위한 정당 조직 건설을 추진하면서 전형적인 국민정당으로 성장하였다.

기민련은 아데나우어 정부(1946-1963년), 에르하르트 정부(1963-1966년), 키 징어 정부(1966-1969년), 콜 정부(1982-1998년), 메르켈 정부(2005- 2021년) 등 총 5개 정부를 (총 55년) 주도하였다. 주요 연정 파트너는 자민당이었으나 키징어 정부 시기와 메르켈 정부 시기에는 사민당과 대연 정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독일 연방의회에서 오직 바이에른주에서만 활동하는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SU)과 함께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며, 이런 방식으로 기민/기사연합(CDU/CSU)은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함께 독일 정당의 양대 세력을 이루고 있다.

CDU 창당과정 (1945-1949)

1945년 2차 세계대전 말 나치 정권이 붕괴하자마자 독일에는 새로운 정치질서 수립이 급선무였다. 이에 다양한 정치집단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정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게 되었다.

CDU는 1945년 6월 26일에 베를린에서, 같은 해 9월에 라인라트 주(州)와 베스트팔렌에서 창설되었다. CDU의 창설 멤버는 주로 독일 중앙당, 독일 민주당, 독일 국가인민당, 독일 인민당의 전 멤버들로 구성됐다.

1945년 12월에는 처음으로 기민련 지구당 준비위원회들이 참여한 전국 창당준비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기민련 창당 주역들은 점차 ‘사회적 시장경제’로 가는 길을 닦았다. 사회적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경제적 자기 결정과 자유이다. 그리고 공정경쟁과 시장가격을 통한 성과주의가 그 두 번째 원칙이었다. 사민당(SPD)의 사회민주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가 아니면서 동시에 다소 진보적인 기독교 세력을 포용할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사회적 시장경제’였다.

또한 1949년 7월 15일 기민련 창당 세력은 뒤셀도르프에 모여 ‘사회적 시장경제’의 기본 내용을 고스란히 담은 새로운 강령인 “뒤셀도르프 강령”(Düsseldorfer Leitsätze)을 만들었다. 초안을 만든 강령분과위원회와 당 지도부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기독교적 사고”, “기독교적 인간상”,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구현하는 제도로 정당화했다.

뒤셀도르프 강령으로 기민련은 다양한 정파들을 모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그 후 가톨릭 중앙당 출신은 물론이고 바이마르공화국 시대 민족주의에 기초해 반유대주의를 주창하던 독일민족인민당, 민족적-자유주의적 경향의 독일인민당, 그리고 좌파 자유주의를 표방하던 독일민주당 등 정치적 지향이 다른 여러 세력이 기민련이라는 한 깃발 아래 모여 국민정당으로 탄생된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로부터 배운 교훈 중 한가지는 민주적 정당의 분열은 궁극적으로 나치 당의 부상을 허용했다. 그래서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의 연합된 당, 즉 기독교 민주 ”연합”을 창설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결과로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의 정치적 전통에 영향을 깊게 받은 범종교적(가톨릭과 개신교) 정당의 설립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민련은 바이에른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기사련(CSU)와 함께 1949년 8월 14일 실시한 독일 연방공화국(서독)의 첫 연방의회 선거에서 유효표의 31%를 득표하여 29.2%를 얻은 사민당(SPD)을 누르고 제1당의 집권 여당이 되었다.

기민련은 1945년 6월 26일 베를린에서 창설된 이후로 1950년 10월 21일 첫 번째 전당 대회까지 상당한 지지를 얻었고, 그 전당 대회에서 수상 아데나워가 초대 당수로 지명되었다.


교포신문사는 독자들의 독일이해를 돕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교육 등에 관해 ‘독일을 이해하자’라는 연재란을 신설하였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1207호 29면, 2021년 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