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속 한국가정에서 겪는 대표적 어려움은 자녀교육,
특히 성장기의 아이들의 언어문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교포신문사에서는 이를 위해 윤재원 박사의 논문 “ 다중 언어 시스템 속 우리의 아이들”을 매월 첫째 주에 연재한다. 전문적인 논문을 일반인들이 이해 할 수 있게 새로이 쉽게 풀어 연재를 해주시는 윤재원 박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
한글 읽기 쓰기
아이들에게 유치원 시기는 한국어든 독일어든 말하기의 기초를 닦는 시기이다. 독일 유치원에서는 학교 입학 일 년 전의 아이들을 취학 전 아동 (Vorschulkinder)이라 명명하고 슬슬 알파벳을 익히거나 이름 쓰기 등에 익숙해지도록 지도를 시작한다.
유치원에 따라 취학 준비를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겠으나 학교생활에 적합한 사회성이나 집중력 기르기, 수 개념 익히기 등을 위한 활동이 대부분이고 한국에서처럼 아이들에게 읽기를 다 섭렵시켜 초등학교를 입학하게 하는 일은 아직까지 독일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다.
아이 한글 공부는 언제부터 시작하는 게 좋냐는 질문은 한국에서도 언어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이다. 읽기는 사실 늦게 배울수록 빨리 배운다. 즉 5세보다는 6세, 6세보다는 7세에 배워야 짧은 시간에 한글을 빨리, 효과적으로 익힐 수 있다. 나이가 많을수록 아이들은 규칙을 익히는 능력이 더 발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한글은 일찍 배울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할 때, 준비 되었을 때 가르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이 어디 그러한가? 유치원부터 경쟁 사회인 한국 부모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입학 전 한글을 다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학교에 입학해서 뒤쳐지지 않고 공부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중언어 환경에 놓인 우리 아이들에게는 언제 각각의 언어를 읽고 쓰도록 가르치는 것이 현명할까? 필자는 두 자녀의 언어 교육 경험을 통해 명백하게 깨달은 바가 있다. 바로 아이들 개인마다 적절한 시기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일단 독일어의 경우를 먼저 이야기하자면, 나의 아이들은 독일어 읽고 쓰기를 학교에 입학해서 배워 나갔다. 독일어에 서툴렀던 나는 아이들에게 잘못 가르치면 안 될 것 같아 공교육에 이 부분을 일임했다. 독일인 남편도 그것이 당연하다(학교가 해야 할 일을 왜 부모가 하는가?)고 생각하였기에 아이들의 독일어 읽고 쓰기를 미리 가르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주야장천 놀아 주기만 했었다.
가끔 유치원에서 삐뚤빼뚤, 좌우가 뒤바뀐 알파벳으로 이름을 써 오면 왕창 칭찬해 주고(뒤에서는 나와 함께 아이의 귀여운 실수를 보고 웃고 사진 찍어 남기느라 정신을 팔았다.), 집에서 빈 종이에 알파벳 비슷한 것을 여기저기 직직 써 대면 그저 기특해서 감동했을 뿐 입학해서 학교에서 배워 올 때까지 독일어 읽고 쓰기는 가정에서 전혀 가르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한글 교육에는 전투적이고 결사적이었다. 아이가 얼마나 잘 배울지는 두고 볼 일이었지만 아이에게 한글 읽고 쓰기를 꼭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가정어(우리에겐 한국어)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읽고 쓰기까지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지게 되는 여러 가지 이점 (지능발달, 학습성취도, 취업에의 영향 이르기까지)들은 수많은 연구를 통해 명백하게 증명되어 왔고, 이중언어로 아이를 키우는 육아 선배들 역시 나에게 아이들에게 꼭 한글 읽고 쓰기를 전수하라고 조언해 주었기 때문이다.
큰아이가 5세가 되었을 때 한글 배우기에 시동을 걸었다. 당시 가장 유행했던(지금도 방영 중이다.) 유아용 한글 교재인 <한글이 야호>라는 EBS 교재를 사용해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는 글자 배우기보다는 교재 속의 호랑이와 스토리에 집중하거나 몇 자 쓰고 뛰어놀기를 반복하며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었는데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기, 음료수 가져오기, 갑자기 연필 깎기, 마구 색칠하고 지우기 등을 하며 함께 하는 20분을 허비해 버렸다. 이런 식으로 오랜 기간에 거쳐 아이와 씨름 아닌 씨름을 해 가며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고 배워 갔다.
그런데 정작 가르치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둘째는 쉽게 덤으로 한글을 배워 버렸다. 그 녀석은 오빠가 한글을 배우는 동안 옆에 앉아서 듣고 있거나, 오빠가 지우개질을 책상에 북북 하면 그 지우개 똥을 모아 다시 손으로 조물조물 염소 똥처럼 만드는 일을 주로 했는데, 어느 날 자기도 글씨를 쓰고 싶다며 같은 책을 달라고 졸랐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였으니 ′어디 한번 시켜 보자.′ 하는 마음으로 내후년쯤에 주려던 책을 미리 꺼내 주었다.
둘째는 그때 세 살 반이었는데 오빠 옆에 앉아서 연필을 잡은 작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글자를 익혀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아이 배우는 데 방해하지 않고 옆에 있어 주니까, 즉 내가 편하니까, 끼워 줬다. 같이 있으니 큰아이도 조금 더 오래 앉아 있는 듯싶어서 너무 어리긴 하지만 붙여 준 것도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녀석은 망둥이처럼 뛰어다니는 오빠와 달리 진득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연필과 크레용으로 점선을 덮어씌우며 글자 쓰는 것을 너무 재미있어 했다. 15분쯤 글자 익히기를 한 다음에 서너 글자 써 보라고 숙제를 내 주면 큰아이는 이미 TV 앞에서 공을 차거나 소형 자동차에 올라타서 부릉거리고 있고, 둘째는 차분한 자세로 앉아 마지막까지 숙제를 마쳤다.
사실 둘째에게 한글 배움의 기회는 주었으나 너무 어린 나이여서 한글을 깨우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런데 두 아이는 이렇게 함께 공부하는 날이 쌓이면서 동시에 한글을 깨우쳐 나갔다. 이 이야기는 아이 둘 이상을 기르는 많은 부모님들이(특히 큰아이와 둘째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경우) 공감하실 것이다.
독일에서 사랑받는 바이올린 크로스 오버 장르의 세계적 연주자 데이비드 가랏도 부모가 큰아이에게 바이올린 교습을 시키려고 무진장 애썼으나 오히려 둘째가 형 따라다니다가 바이올린을 시작하여 세계적 연주자가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세계 최고 배구 선수인 김연경도 큰언니가 배구 선수여서 언니를 따라다니다가 세계를 주름잡게 되었고, 피겨 스케이팅의 일인자 김연아도 언니를 따라 피겨 스케이트를 배우다 언니는 도중에 그만두고 본인은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가정에서 언어 익히는 과정을 세계적으로 최고 자리에 오른 동생들의 일화에 비유하는 것은 다소 엉뚱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냥 따라 하다가 좋아하게 되고 해내는 일이 정말로 있더라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아마도 큰아이는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닌 부모가 계획해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니 배우는 일이 별로 즐겁지 않았을 것이고, 둘째는 부모의 기대는 큰아이가 떠안아 주고 자신은 자유로운 마음으로 배울 수 있으니 배움의 과정이 진정으로 즐거웠을 것이다.
집에서 배우는 것이 여의치 않으면 한글 학교에 다니는 것 역시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집에서 부모에게 한글을 배운다 할지라도 한글 학교에 다니는 것은 여러모로 아이들에게 중요한 일이다. 한글학교에서는 한글뿐 아니라 한국 문화와 공동체에 대해서도 배우고 한국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글 학교는 모든 모국어 교육 시스템이 그러하듯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점을 잘 알고 모자란 부분을 집에서 잘 지원해 주면 된다. 공교육 시스템도 불완전한데 타국에서 공교육 이외에 행해지는 한글 학교 교육이 완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 싶다.
나는 아이를 한글학교에 보내지 못하였는데, 그렇다고 혼자서 한글 공부를 시킨 것은 아니다. 아니 전적으로 아이의 한글 공부를 다른 선생님들께 맡겼다. 당시 나는 매일 일하고 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한국인 유학생에게 주로 이 일을 맡겼다.
독일로 유학 온 한국인 학생들은 정말 대단한 인재 풀이다. 특히 내가 사는 뒤셀도르프는 미술, 음악, 체육 등을 전공한 실력 있는 학생들이 많아 그분들을 베이비시터로 모시는 영광을 누렸다. 독일 개념으로는 베이비시터이지만 아이들과 나는 이분들을 선생님이라 불렀고, 우리는 이분들과 함께 작은 유치원 같은 환경을 만들었다.
한국인 선생님은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간식도 먹고, 한국어만을 사용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중 아이들을 오랜 시간 동안 보살피고 잘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계신데, 항상 아이들이 원하는 책을 고르도록 해서 체계적으로 읽어 주고 아이들이 조금씩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매우 좋아했고 성실하신 선생님께서는 수년간 아이들과 함께하며 읽기 쓰기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셨다.
사실 이전에는 짧은 기간 안에 선생님들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이것이 일하는 엄마 입장에서는 힘들고 괴로웠지만 아이들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여러 명의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기에 전혀 나쁜 일은 아니었다.
주중에는 한국인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내가 직접 아이들과 놀면서 한글 공부를 시도했는데(한글 학교에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토요일마저 아이들과의 시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경험상 성공한 전략(다중언어 연구가들에 의해 성공 전략으로 증명된 것들) 몇 가지를 공유하고자 한다.
1. 같은 동화책을 한글, 독일어, 영어로 읽어 주었다.
그중 (솔직히 말하자면)한글로 된 책을 가장 열심히 읽어 주었고, 독일어는 CD (오디오 북)로 대체하였다. 삽화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글 책은 가장 큰 것으로, 그다음이 영어 책, 독일어 책은 가장 작은 것으로 보통 구매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렸다. 왜냐하면 앞으로 학교에서(그리고 사회에서) 독일어가 가장 중요한 언어이기에 적어도 집에서는 다른 언어적 위계가 필요했다. 즉 가정 내에서 한글의 중요성을 지켜 내기 위해 한글 책은 가장 큰 것으로 구매했다. 아이들은 대부분 내가 한글 책을 읽어 주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어쩌겠는가! 그 나이에는 엄마가 최고인 것을(물론 지금은 순번이 밀려 가장 꼴찌지만).
2. 한글 책을 읽어 줄 때는 아이들에게 꼭 선택권을 주었다.
여러 권을 펼쳐 놓고 아이가 직접 원하는 책을 고르도록 했다. 아이들은 매번 똑같은 책을 고르곤 했는데 그냥 그 책들을 주야장천 읽어 주었다. 본인들이 좋아하는 책을 고르게 하니 책 읽는 시간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고, 매번 같은 책들을 읽다 보면 한 줄 두 줄 아이들에게 직접 읽게 하는 부분을 만들어서(예를 들어 주인공이 말하는 부분이나 감탄사가 나오는 부분) 아이들이 직접 읽는 부분의 범위를 점점 넓혀 갔다. 나중에는 거의 한 권을 통째로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생겨났다.
3. 한국을 방문할 때면 아이들이 한국어 능력을 스스로 발견하고 활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가령 인천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아이들이 간판에서 아는 글자를 한두 개라도 읽어 보도록 유도했더니 아이들은 스스로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에 매우 기뻐했다. 빵집이나 편의점에서 먹고 싶은 간식 포장지의 글자를 읽어 내면 칭찬을 아끼지 않고 바로 사 주기도 했다(맞다! 뇌물을 먹였다.).
4. 독일 상황과 동떨어진 교과서에 실린 동화나 전래 동화보다는 아이들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동화를 읽어 주었다.
사실 전래 동화를 아이가 좋아한다면 여러모로 좋은 점이 있다. 왜냐하면 전래 동화는 한국 특유의 정서를 포함해서 우리 예전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방문을 자주 할 수 없어 한국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우리 아이들에게 처마, 원님, 옥황상제 등등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꽉 차 있는 전래 동화를 읽어 주는 것은 난관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한독 어린이의 공통적인 정서와 상황을 담은 동화책을 주로 구입해서 읽어 주었다.
5. 무엇보다도 내가 많이 읽었다.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아이들이 자기 책을 들고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엄마가 조용히 앉아 있으니 자기들도 참견을 하려면 책을 들고 와 앉아야 하는 것을 알았다.
6. 마지막으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선택함에 있어서 다양한 모국어를 가진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우선순위에 놓고 최종 학교를 결정했다.
이것은 과거(현재도) 많은 교민들의 선택, 즉 독일인 아이들이 가장 많은 곳에 가야 아이가 독일어를 빨리 배우고 학교의 질이 높을 것이라는 믿음과는 상반되는 결정이었는데, 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민자 가정이 가장 많은 큰 학교를 선택했고 그 이유는 분명했다. 친구들이 다언어 사용자여야만 내 아이도 다언어 사용자로 남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선택은 옳았고, 아이들은 지금까지 왜 다른 아이들은 독일어만 해도 되는데 나는 한국어, 영어를 다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을 표현한 적 이 없다. 환경이 그렇게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다.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대부분의 부모에게는 엄청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 부모들은 일단 교육열이 엄청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다른 문화권의 부모에 비해 쉽게 감수해 낸다. 내 자녀가 독일어뿐 아니라 나의 나라말을 읽고 쓸 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글자를 깨우치는 것을 넘어 그 문화의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소년기에 이 과업의 초석을 다지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게다가 고맙게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중요성이 상당히 커졌다. 이제는 교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단계에서 벗어나 세계적 트렌드가 되고 있기에, 과거 선배들에 비해 적어도 마음은 훨씬 덜 힘겹게 이 씨앗을 심어 나갈 수 있다.
<기고자 소개>
• 현 독일 루르 보훔대학교 한국학 강사, 쾰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사회 언어학 및 어린이 다중언어 발달 교육 강사
• 기업 이문화 컨설턴트 (Interkuturelle Beratung, Cross-cultural consultant)
• 독일 쾰른대학교, 다중언어 어린이 한국어 습득에 관한 연구로 언어학 박사
• 미국 메릴랜드주립대 (UMBC) 언어문화교육 석사
• 현 11학년과 10학년 자녀의 엄마
1245호 20-21면, 2021년 1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