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광부 60년 (3)

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의 ‘뒤셀도르프 공항’. 에어 프랑스 제트기 한 대가 도착했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검은 머리의 한국인, 바로 파독광부 1차1진이었다. 1차1진은 모두 123명. 그리고 5일 12월 27일, 1차1진 나머지인 124명이 독일에 도착했다. 이렇게 1차 1진 247명을 시작으로 파독 근로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교포신문사에서는 파독 광부 60주년을 맞아, 1월부터 매월 4 째주 “파독광부 60년” 특집을 이들이 도착한 12월 22일까지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독자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독일 ‘루어(Ruhr) 지방’의 전후 발전 이면사

독일이 세계 1, 2차 대전에서 거듭 철저하게 패망한 이후, 그러나 빠른 세월 속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해온 그 배경 이야기를 할 때는 당연하게 ‘라인강의 기적’으로 상징적인 표현을 한다. 또한 뒤를 이어서 이미 13세기 때부터 독일 전국 도시 상공인들이 처음으로 시작하였었고, 또한 자발적인 연합체였던 ‘한자동맹(Staete von der deutsche kaufmangenossenschaften Hanse)’의 원래 첫 발상지이기도한 ‘루어 지방’이 동시에 일컬어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최근까지 이곳을 ‘루르 지방’으로 표현해 왔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이곳을 반드시 ‘루어 지방’으로 지칭해 줘야 발음상 옳다.

그런데 전후에 현대 중공업 분야를 급진적으로 이루어 온 이곳 루어 지방은 지난날 후진국 우리나라가 현대 경제 발전의 한 시금석과 그 표본으로 삼아왔었고, 또한 1960년대부터는 한국인 광부들이 이곳에서 집단적으로 취업해 왔기 때문에 매우 밀접한 역사적인 관계가 서로 얽혀있어서, 이 지방이 전후에 부국으로 다시 재 부상했던 그 과정을 대충 요약해 본다.

전후 96% 의 피해 복구 재개발 사업

세계 제 2차 대전을 발발했던 독일을 연합국인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이 전후 문제로 같이 회동했던 얄타회담(Jalta)의 결정에 따라서 4개의 군사위수 지역으로 각각 크게 행정 분할(Die allierten Militaeerbehoerden)이 된 1945년 4월 15일에 루어 지방에는 영국이 다스리는 군사섭정 행정부서가 처음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바로 이 지방의 한 가지 예로 지난 1943년 3월 5일에 영국군의 전투 비행 공단이 에센(Essen)시 단 한 곳에만 약 80분 동안을 일제히 공습할 때, 모두 1천 개의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폭탄과 또한 12만 5천 개의 소화 화염 폭탄 세례를 집중 퍼부어서, 이 도시가 거의 96%이상으로 전파된 실정이였다.

그밖에도 지난날의 통계에 따르면 루어 지방의 또 다른 17개 중소 중공업 도시를 대상으로 연합군 공군 공습 비행단이 모두 약 2천 회나 밤낮으로 공격을 하면서 총 23만 3천 개의 강력한 폭탄과 또한 무려 5백 40만 개의 화염 폭탄 세례를 퍼부어서, 이 지방에서 제 모습을 갖춘 잔존 건물들은 겨우 4% 정도였다는 역사 기록이 남아있다.

이와 같이 엄청난 피해를 받았던 이 지방에 대한 전후 재개발사업으로 먼저 RWE 전력 회사의 전선 보수 공사와 도시 가스 공급, 자동차 시내 노선 복구공사, 그리고 전철과 철도 재개통 공사, 또한 생필품 생산공장들을 전쟁 전의 상태로 다시 복구하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 한편 새 민주주의에 입각한 기독교 민주동맹(CDU)과 독일 사회민주당(SDP), 뮌헨의 기독교 사회주의 민주당(CSU), 그리고 자유민주당(FDP)과 같은 새로운 각 정당 조직과 함께 라디오, 신문사를 각각 설립하면서, 새 행정부의 국가 재건설 의지를 밝혀 전후의 혼란했던 민심 수습에 나섰다.

또한 1948년 6월 20일에 독일 화폐를 개혁하면서 당시 제국마르크 60RD에 대해서 한 사람 당 40마르크로 서로 맞교환 하도록 하였고, 또한 1948년 이후에 건국된 동독 지방을 제외한 다른 세 곳의 군사 위수지역 안에 있었던 각 은행들에게, 직접적인 화폐 유통을 또 다시 허용하였지만, 그러나 최고 10Mrd. 마르크까지의 통화를 한정하도록 유통 억제 제한했었다.

그런데 2차 대전의 격렬한 전투 동안 루어 지방에서만 약 1백 91만 1천 3백 명의 젊은 참전 병사가 전사하였고 거의 같은 수준으로 민병대가 희생되거나 전쟁 포로, 또는 부상자가 동시에 발생하므로, 나치 정부가 도모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입었던 엄청난 피해 상황집계를 당시에는 제대로 할 수도 없었던 형편 이였다.

공산 세력을 견제하려던 경제 복구자금 – 마샬 정책(Marschallplan)

우리나라에서도 해방이후 흉흉한 민심과 공산, 또는 민주 이념을 서로 따르는 좌 우파 이념 분쟁이 있었듯이 독일에서도 공산 세력 소련의 방해로, 동독 지방에는 독일 공산- 사회 연합당(KPD-SPD)이 1946년 4월달에 따로 조직되므로, 서독과는 서로 분리된 다른 체재의 정부가 각각 세워 지는 불행을 초래했었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동독 공산 정부를 서로 견제하면서 또한 서독의 강력한 경제 발전을 추진하려던 목적으로, 미국이 첫 주도한 마샬정책(Weg fuer eine Milliarde Kredit frei,- ist die Wirtschaft-lische Ergaenzung zur ‘Contain-ment-Politik’der USA)이 1949년 12월 16일에 본(Bonn)에서 당시의 초대수상 콘라드 아데나우워와 체결되었다. 그런데 이 마샬 정책(Maschall-Abkommen) 은 미국의 군사 관구장이였던 죤 제이 맥 클로이(John Jay McCloy)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경제 원조 정책으로서, 원래는 유럽 지역이 입었던 제 2차 대전의 피해 복구비(European Recovery Programm) 가운데서 따로 떼어서, 독일에 포괄적으로 할당해 준 특별 차관이었다.

이 차관 비는 먼저 생필품 생산을 위한 원자재 공급과 식량 무상 원조, 그리고 중소기업에 대한 은행 융자를 위해서 해당 국가의 중앙은행 자금으로 공급해 주므로, 그 사업 목적을 엄격하게 따로 감독하도록 책정해 준 별정 복구자금이였다.

이 자본금에서 독일 쪽에다 당시 5천만 달라(즉 약 10억 마르크)의 생산 투자 자금이 즉시 공급되므로, 서독은 이 자금에서 1차 에너지 산업 분야와 농공 분야, 또한 고속도로와 새 시민 주택 (Neu- Heimat) 건설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했었다. 그런데 이 자금 가운데서 약 1500만 마르크는 당시 루어 지방의 광산 업계에다 집중적으로 다시 투자되므로, 광산 업계가 전 후의 석탄 생산에 주력할 수 있었던 그 기본 종자돈이 되었다.

외국인 노동력으로 독일 경제 성장의 첫 기초 다져

그러나 지난 1946년부터 루어 지방의 광산 업계는 광산 종사자의 연령을 젊은이들로 대체하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약 14-25세 정도의 종사자를 대대적으로 모집하였지만, 두 번의 전쟁 희생자로 인해서 엄청난 인력 부족 현상을 초래하며 당시 에너지 공급에 큰 지장을 가져 왔다.

원래 이 지방은 두 번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심지어는 부녀자 광부와 또한 광산, 철강 군수업체 노역자로 이웃 점령국의 유태인, 외국인 젊은이들을 차출하여서 강제 노역을 시켜 왔었으나, 전후 패전국으로서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정책을 또다시 반복 할 수 없던 형편 이였기 때문에 그 대안 책으로, 새 정부의 독일 외상 안톤 스트로쉬(Anton Strosch)와 이탈리아 가에타노 마티노(Gaetano Martino)외상이 지난 1955년 12월 20일에 로마에서 이태리 노동자 10만 명을 첫해 1년 동안의 시한부 서독 지역 각 기업체 노동자로 인력을 수입하는 계약을 처음으로 체결하였었다.

그런데 이 노동 정책이 후일 ‘독일 라인강의 기적’을 가져다준 직·간접적인 원동력이 되었고, 또한 이때부터 외국인 노동력과 각 국의 정치 망명자들을 계속 받아들인 결과로, 오늘날에는 약 8-9백만 명의 외국인들이 독일에서 장기 체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밖에도 지난 1972년도의 집계에 따르면, 전후 동부 실지에서 살다가 헝가리와 체코, 루마니아, 리타운, 폴란드 등 전 동구권 각 국에서 쫓겨 온 1천 2백만 명이나 되는 독일계의 난민들이 또한 있다.

약 5천만 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다 준 제 2차 대전 때, 독일 쪽에서도 전사자 4백 7십 5만 명(민간인 50만 포함)과 전쟁 포로, 헤아릴 수 없던 많은 실종자가 발생했었다. 그밖에도 2백 6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고아가 각각 발생하므로 이들 난민 이산가족 자녀들에게 우선 사회 보장 주택(Sozial-wohnung)을 제공하면서, 취업 또는 직업 양성 기술자 집중교육(복흠 루어 대학 개교)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딘스라켄-로베르크, 복흠-봐이트마 지역과 또한 라인-베스트팔렌 지역에다 주택 단지를 조성해서, 그곳의 이름을 스위스 교육자 페스탈로치 마을(Pestalozzi-Doerfer)로 상징적인 지명을 명명하였었다. 바로 이곳의 광부 기숙사에 처음으로 입주했던 초창기 때의 한국인 서독 광부들을 박대통령 일행이 1964년 12월에 직접 방문하고 그들을 위로하였던 사실이 있었다.

1308호 14면, 2023년 3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