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1년 9월 8일)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한 조약이라고 주장해왔다. 조약 제2조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청구권을 포기한다’고 해 일본이 포기한 섬 명칭에서 독도가 빠져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공인했다”며 일본 주장에 정면 반박한다. 이번 주 나온 대한민국 학술원 논문집에 실린 ‘연합국의 샌프란시스코 대(對) 일본 평화조약에서 독도=한국 영토 확정과 재확인’을 통해서다.
신 교수는 평화회담 이틀째인 1951년 9월 5일 연합국의 대일(對日) 평화조약 체결을 책임진 존 포스터 덜레스(1888~1959) 조약 준비위원장이 51개 참가국 대표 앞에서 한 연설에 주목한다. 덜레스는 4시간짜리 연설에서 일본 영토 조항에 대한 ‘유권해석’을 내렸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평화조약으로 1945년 실행된 포츠담 선언 항복 조건(제8항)의 영토 규정을 공식적으로 비준하는 것’뿐이라는 설명이었다.
종전 직전 나온 포츠담 선언(1945년 7월 26일)은 일본 영토를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로 한정했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 촉구에 따라 무조건 항복했고,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포츠담 선언에 따라 1946년 1월 SCAPIN 제677호를 내려 일본 영토에서 독도를 제외해 한국에 반환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엔 점령 당국(연합군 최고사령부)이 점령 기간에 집행한 모든 지령과 조치는 일본 정부가 승인해 후에 소송하지 않는다는 조항(제19조)까지 포함됐다. 일본 국회 중의원(衆議院)은 일 정부가 독도를 한국 영토로 그린 ‘일본영역참고도’를 검토한 뒤 평화조약을 승인했다.
신 교수는 “일본이 포기할 섬으로 제주도·거문도·울릉도만 언급한 것은 독도가 너무 작은 무인도였기 때문에 간결한 조약문에 넣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일본이 이 3곳을 제외한 한반도 주변 섬 4000곳을 영유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라고 말한다. 덜레스 연설을 한국의 독도 영유권과 연관지어 주목한 국내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학계에서는 “덜레스 연설은 평화조약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했다는 일본 측 주장을 반박할 만한 근거가 될 수 있다”면서도 “미국이 냉전 대립으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을 서두르면서 영토 조항을 모호하게 다뤄 분쟁의 소지를 남겼다”고 지적한다.
사진: 1953년 8월 서울에서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는 덜레스(앞줄 오른쪽) 미 국무장관과 변영태 외무장관.
2020년 2월 14일, 1158호 29-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