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연재] 해로 (Kultursensible Altenhilfe HeRo e.V.)

41회: 해로 사진전 풍경

토요일이 되자 전시장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옛 사진 속에 오랜 지인의 모습들이 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며 사진전의 방문객이 늘어난 것이다. 전시 내내 자원봉사자들이 순번을 돌아가며 전시장을 지켜주었지만, 마지막 날에는 오시겠다는 분이 많아 일찍부터 가서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자매님, 토요일에 뵈러 갈게요.”

“저도 갑니다. 그때 뵈어요.”

<해로 세대공감 사진전>이 방송을 타며 베를린 추기경과 함께 찍은 옛날 단체 사진이 화면에 나가서인지 한인 성당에서도 여러분이 찾아오셨다.

“누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하나같이 예쁠까?”

“우리도 저 때에는 저렇게 예뻤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젊음이 아름다운 거예요.”

독일에 산 지 50년이 되었다는 전직 간호사 할머니들은 한복을 곱게 입은 사진 속의 아가씨들을 보며 새삼스레 감탄을 연발하신다. 그리고 간혹 그 안에서 아는 사람으로 보이는 얼굴을 추측하며 서로 물어보고 즐거워하신다.

불현듯 입구가 소란스러워 쳐다보니 독일 전직 총리 부부가 전시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전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모두 슈뢰더 전 총리를 바라보았다. 한국인 부인과 손을 꼭 잡고 찬찬히 전시장을 돌아본 전 총리는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짧은 즉석연설을 하였고 동시통역가 출신인 김소연 여사가 통역하였다.

전시된 사진을 보며 파독 근로자의 이주가 한독 관계에 이바지한 점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그는 차범근 선수와 얽힌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예전에 총리가 아닐 때 다른 일로 한국의 판문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매우 많은 사람이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먼 나라의 정치가를 기다리는 모습에 감동하여 한국인의 높은 정치적 관심을 치하하려는데 마침 다른 쪽에서 등장한 차범근 선수에게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을 보고 기다리던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렸고 차 선수가 독일에서도 무척 유명하였기에 축구 선수에 비하면 정치가의 인기는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겸손을 배웠단다. 청중 속에서 웃음이 터지고 벽에 걸린 레버쿠젠 구단의 차범근 선수와 파독 근로자의 사진이 우리를 보고 따라 웃고 있었다.

이어 전 총리 부인의 사진전을 찾게 된 계기가 이어졌다.

“작년 봄에 코로나 확산 초기에 마스크 수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제가 재봉을 해서 직접 마스크를 만들었는데, 고령 한인 어르신들에게도 전달해달라고 그중 몇 개를 <해로> 단체에 보냈어요. 그중 한 분이 마스크가 도착하기 직전에 돌아가셨고 저의 마스크가 그분 생의 마지막 선물이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사 오십 년 전에 독일에서 번 돈을 송금하며 가난했던 고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교포 여러분들을 늘 기억하고 싶어 그 후 사단법인 해로의 일을 꾸준히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연달아 방문한 단체 방문객들이 빠져나가고 한가해지자 한쪽에 마련된 응접실에 내내 앉아 계시던 여든이 넘은 어르신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인근에 사시면서 전시장 종사자들이 먹으라며 컵라면을 들고 매일 전시장을 찾아오셨던 분이다.

“이렇게 나올 데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평소에는 갈 곳도 없고 집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는데..”

전시장에 한국 사람들이 늘 있으니까 아주 좋으셨나 보다. 자녀도 없고 남편은 이미 예전에 돌아가셨다는 그분의 어깨너머로 외로움이 넘실거린다. 폐장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둘러앉아 함께 담소를 나누던 우리는 그분에게 개근상을 수여하기로 하였다.

연세가 80이시니 상장에 8학년 0반으로 쓰겠다고 하자 그분은 황급히 손을 내어 저으시며‚ “제발 8학년이 아니라 6학년으로 적어 달라”고 하신다. 재미 삼아 만드는 개근상장이었지만 사실 우리는 이렇게라도 혼자 걸어 다니실 수 있는 그분의 소중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상장을 받고 무척 좋아하시는 어르신의 모습에 바라보는 우리도 기뻤다.

사단법인 <해로>와 인연을 맺고 지내던 어르신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못 걷게 되시거나 의사 표현을 못 하게 되시고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 곁을 영영 떠나 버리셔서 그리움과 아쉬움만 남게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우리들이었기에 장난스러운 개근상을 빙자하여 그분의 건강을 치하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남아 있는 날 동안의 건강을 소망하였던 것 같다.

망자를 기억하는 11월, 해로 호스피스는 ‚돌아가신 환우를 위한 기도회‘를 통해 고인을 추모한다. 살아있는 동안 같이 쌓아온 추억이 그리움으로 변했지만 서로 마지막을 배웅해 주며 먼저 떠난 지인이 이승에서 평안하도록 빌어주며 떠나보낸 우리의 텅 빈 가슴도 위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1244호 16면, 2021년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