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면 2024년 1월이 된다. 1월은 영어로 January라 하는데, 이 단어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야누스(Janus)신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Janus는 두 얼굴을 가진 신인데, 전쟁과 평화, 행복과 불행, 과거와 미래와 같은 이중성을 상징한다. 1월은 과거를 돌아보는 동시에 미래를 내다보는 달이라 해서 Janus의 달이라 부르는 것 같다.
송구영신(送舊迎新)도 두 가지의 뜻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과거는 약간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가능하면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고 해서 12월에는 망년회(忘年會)를 많이 했었다. 그러나 미래는 반갑게 맞으며 축하한다. 그래서 많은 단체들이 새해에 대한 기대를 품고 신년하례식(賀禮式)을 한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전 인류에게 불행한 해였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매우 힘들고 불편하게 살았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으며, 그 여파로 모든 나라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망년회를 해서 안 좋았던 것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Reset(처음으로 돌려놓기)”하여 새롭게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조차 든다.
그러나 과거라 해서 모두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과거의 바탕이 있어야 미래가 가능하고, 과거에 쌓은 능력으로 미래를 만들 수 있으며, 과거에 형성된 원칙으로 미래에 더 나은 활동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에는 “기억하라”란 명령이 많이 반복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의 노예로 지냈던 때를 기억하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Passover)’을 기억하고 지키라고 하셨다.
기독교인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의미도 있다. 지난 모든 과거를 다 잊어버리고 없애버려서도 안 되고, 만약 잃어버리고 잊어버렸다면 다시 찾고 기억해야 유익한 것도 많다.
한 해가 끝나는 때에 우리는 한 해를 다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영국의 총리였던 처칠은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에 실패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고, 소크라테스는 “우리는 우리가 잘한 것으로부터 배우기보다 잘못한 것으로부터 더 많이 배운다”라고 했다. 우리는 과거와 실패를 통해 성장하기 때문에 과거를 잊으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과거가 주는 유익을 찾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발전한다.
젊어서는 왕성하게 사업도 하고 봉사도 많이 했지만, 파독의 세월에 지쳐 몸은 병들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잘 나가던 사업과 일들도 지금은 엉망이 되어 감당할 수 없는 어르신들이 있다. 또한 연로하셔서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사소한 일들조차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른들도 자꾸 늘어가고 있다.
조금 일찍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잘 정리하며 살아왔다면, 지금과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으실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은 분들이 주위에 많다.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의 그늘이 이렇게 클 줄은 미처 모르셨을 것이다.
A이모님은 누구보다도 건강하다고 자부하며 몸을 돌보지 않고 사업과 봉사에 적극적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거동도 하기 어려운 상황에 계신다. 사업 관계 일 처리를 잘못해서 그동안 일궈온 많은 일들도 이제는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 되었다. 그런 일로 자녀들과 지인들과의 관계도 멀어져서 후회스런 기억들만 가득한 모습이다.
H이모님은 초기 치매 증상을 보이며 자신의 통장에 있는 돈을 누가 빼갔다고 의심하기도 하고, 핸드폰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 핸드폰의 데이터를 가까운 봉사자가 다 빼 쓴다고 엉뚱한 고집을 부리며 주위 사람들을 괴롭게 하신다. 자녀들과 은행, 통신사를 통해 사실을 증명해 주어도 조금 지나면 다시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신다.
크고 작은 이런 일들을 가까이에서 겪는 “해로”의 봉사자들은 너무 지쳐서 봉사를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파독 1세대 어르신들의 고달프게 살아온 삶을 알기에, 병들고 지친 파독 1세대 어르신들을 섬기는 일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의지할 사람 없는 낯선 이방 땅에서, 오직 자신만을 믿고 강인하게 살아온 세월 동안 굳어진 생각과 습관들이 만들어 낸 삶의 결과이기에 지금 고치고 바꾸기는 힘들다.
강아지도 자기를 이뻐하는 사람을 알아보듯, 치매 환자들도 아무것도 모르는 듯하지만, 자신을 사랑으로 돌봐주는 사람을 알아본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어르신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사랑으로 보듬어 드리는 일이 최고의 방법이다.
한 해를 돌아보면 해로의 봉사자들은 파독 1세대 어르신들을 섬기며 궂은일을 참 많이 했다. 우리 봉사자들은 칭찬은커녕 때로는 좋은 소리도 못 들으면서 묵묵히 수고로운 헌신을 계속했다. 그들의 말 없는 섬김이 있기에 우리 교민 사회가 더욱 밝고 건강한 모습을 지탱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칭찬하고 격려해 주지는 않아도 우리의 노고는 하늘에서 기억하고 있음을 믿는다. 봉사자들의 수고와 아픔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고 그 결과까지도 책임을 지실 것이다.
수고한 당신들에게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싶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수고한 당신, 당신을 안아주세요. 올해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누가복음 23:42)
박희명 선교사 (호스피스 Seelsorger)
1344호 18면, 2023년 1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