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법관이라 불리는 김홍섭 (1915 – 1965)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의로운 재판관이었습니다. 그의 책상에는 항상 성경과 육법전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판결을 내릴 때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판결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도 나도 모두 죄인입니다. 다만, 오늘 나는 법관이 되어 당신을 심판하게 되었을 뿐, 널리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재판이 끝난 후에는 법의를 벗고, 감방에 가서 피고인들을 위로 하고, 그들의 가족을 돌보아 주곤 하였습니다. 때로는 식사를 하다가 숟가락을 놓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이 판결을 내린 자들이 차디찬 감방에서 떨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따뜻하게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죄송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전라북도 전주 지방 법원장으로 부임하던 날, 그를 환영하기 위해 지방 유지들이 모여 잔치를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 때 김홍섭 판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6.25전쟁의 참화와 거듭되는 흉년으로 민중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이 때에 어찌 우리가 이런 주연상을 차려 놓고 앉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김홍섭은 16살이 되든 해,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든 아브라함 링컨의 전기를 읽고, <독학을 해서도 얼마든지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감동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법률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스무 살이 되는 1935년 5월, 불타는 향학열을 가누기 어려워 고향인 전라북도 김제를 떠나, 전주에 도착하여 가슴에 꿈을 가득 안고 변호사 사무실들이 모여 있는 거리를 기웃거리며 배회하다가 우연찮게 일본인 변호사 <하사나가>를 만나게 됩니다.
<하사나가>는 침착하고 건강해 보이는 조선 청년 김홍섭을 자기 밑에서 심부름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본성이 성실하고 침착한 김홍섭은 자신의 주인되는 <하사나가>를 열심히 보좌하면서 자나 깨나 법률서적을 항상 곁에 두고, 미래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하사나가>의 주선으로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전문부 1학년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고학을 하면서 공부하던 김홍섭은 1년 후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게 됩니다. 희망하던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와세다대학 문과에 청강생으로 들어가 젊은 날에 하지 못한 인문, 역사, 철학 등을 공부 하였습니다. 1년 후 귀국하여 당시 독립 운동가들의 변론을 도맡아 애국혼을 키우고 있던 김 병로의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게 됩니다.
해방이 되고 미군정시대가 열리면서 김홍섭은 검사로 발령 받게 됩니다. 1946년 5월 조선 정판사 위조지페 사건 등, 여러 정치적 사건을 겪으면서, 소신껏 양심에 따라 수사권을 지휘하려고 노력했지만, 정치권력의 압력으로 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고민하다가 마침내 검사직을 내던져 버립니다. 그리고 한강변 뚝섬에 자리를 잡고, 닭과 돼지를 키우면서 농사를 짓는 농부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김홍섭은 부산으로 피난을 떠납니다. 부산에서 다시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되고, 환도 후, 서울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됩니다. 끊어져버린 한강 다리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한 많은 시민들이 부역자로 몰리고, 인민군치하에서 숨어 지내던 사람들이 이웃집 장독에서 간장을 가져다 먹고 잡혀 특수절도죄로 재판정에 서는 등, 환도 서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김홍섭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스스로에게 <이런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재판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탄식하며, 깊은 번뇌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1953년 4월 김 홍섭은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됩니다.
초대 대법원장이었든 가인 김병로 대법원장과 함께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가장 존경받는 법관으로 손꼽히는 김홍섭판사는 판사 재임 시절 피고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한 재판장으로 유명 합니다. 구치소를 찾아가 사형수를 면회하거나, 그들의 무덤을 찾아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살다간 고인에게 <장면 전 총리>는 거룩한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도 법관>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김홍섭은 청빈한 삶으로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서울고법부장 판사로 재직할 때에도 10년 동안 군 작업복 바지에 장인에게 물려받은 양복저고리를 입고, 도시락과 법전을 옆구리에 낀 채 출근하던 그를 보고 주변에서는 도시락 판사라고 불렀습니다. 1960년대 초 고위직 공무원 부인들이 관용차를 사적으로 이용하는 문제가 불거지자, 한 법조 전문지에 <대법관만이라도 호화 승옹차를 타고 다니는 일을 스스로 삼가야 한다.>라는 글을 기고해 법조계에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을 정도로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일제 말기 변호사로 생활하다가 해방 후 판사로 임용된 그는 서울지법 부장판사, 서울고법부장판사, 광주고법원장을 역임 했으며, 서울 고등법원장이었든 1965년 간암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집트를 정복하려고 사막을 걷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 이글거리는 뜨거운 태양아래 식수는 바닥이 났고, 병사들은 완전히 지친 상태로 다리를 질질 끌며 겨우, 겨우 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구인가, <,오아시스다!> 하고 외쳤습니다. 다른 병사들 눈에도 아지랑이처럼 흐물거리는 오아시스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오아시스는 가까워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함께 진군하던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 가스파드가 나폴레옹에게 <저것은 신기루입니다. 저곳을 따라가면 절대 오아시스가 나오지 않습니다. 지도를 따라 가야 합니다. 가스파드는 지도에 의해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열과 공기의 변화를 관찰하며, 결국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었고, 모든 병사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기로에 서 있습니다. 대법원과 헌법 재판소는 큰 판결을 지척에 두고 있습니다. 신기루를 오아시스라고 국민에게 알리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겸손하고, 정직하게, 사도 판사라고 불리던 김홍섭 판사님처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헌법의 기준에 맞추어 판결을 하셔서, 대한민국에 진정한 오아시스를 안겨 주셔야 합니다.
저는 100% 확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넘치도록 축복하시고, 큰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라고!
오늘 소개드리는 김효정 아동은 대구광역시에 위치한 양육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동의 친엄마는 남편과 이혼 한 후, 홀로 아동을 키워 왔으며, 현재는 남편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입니다. 또한 엄마는 섬유근육통이라는 질환을 앓아 병원 치료를 받고 있었으나, 지속되는 통증과 심한 우울 증세로 정신적인 어려움까지 겹쳐, 일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도움을 요청할 가족도 없고, 아동을 키울 수 있는 기본적인 요건이 마련되지 않아 효정아동은 2024년 5월 현재의 시설에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나이는 7세로 시설생활에 잘 적응하여, 친구와 동생들에게 인기가 많고, 시설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아동은 이상지질혈증이 있으나,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건강한 편입니다. 아동은 대체로 조용한 편이지만,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 입니다. 아동의 장래 희망은 아나운서가 되는 것입니다.
교민 여러분의 후원과 격려는 효정아동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박 해 철 선교사 드림
1395호 34면, 2025년 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