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 러시아의 엘리자베스 (Elisabeth)

Dipl.-Ing.WONKYO Institute

러시아의 엘리자베스는 1741-1761년까지 20년간 러시아 제국을 다스린 여왕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Elisabeta Peterrovna) 이지만 일반적으로 엘리자베스로 부른다. 제 1대 표드르 대제 (Peter der Große) 와 제2대 예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명석한 두뇌 등으로 왕궁의 친위대 사이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부모인 표드르 대제와 예카타리나는 둘 만이 아는 비밀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지 2년 후에야 결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고 엘리자베스도 딸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성장한 후에 결혼 대상자를 고르는 데에서 문제가 되었다. 여러 결혼 계획이 무산된 후, 엘리자베스는 결국 독신으로 살 것으로 마음먹었다.

1725년 표드르 1세가 사망하자, 처음에는 예카테리나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녀가 1727년에 사망한 후, 표드르 2세, 안나 이바노브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시 생후 몇 달밖에 되지 않았던 이반 6세가 차례로 황제로 즉위했다.

엘리자베스는 러시아왕가가 독일계 출신의 고문과 그들 측근들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 되고 있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로마노프 왕조의 6번째 왕이었지만 여왕으로서는 세 번째이다. 스스로를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대표자일 것으로 생각했다.

신랑될 사람을 여러 번 만나 보는 기회도 있었고 혼담도 여러번 있었지만 번번히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한창 아름다운 미모로 여러 총각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엘리자베타는 독일 홀스타인의 칼 아우구스트 왕자와 약혼 이야기도 있었으나 그가 병에 걸려 요절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그녀가 독신으로 살 것을 발표하자 아우구스트의 죽음을 잊지 못한 결정일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띄어난 그녀의 미모와 문학과 예술의 이해 그리고 사치성이 신랑 후보들을 미리 겁을 먹게 하지 않았는가 싶다.

엘리자베스의 언니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 즉 조카가 되는 칼 페터 울릭히(Karl Peter Ulig)를 차기 후임자로 지정했으니 곧 포드르 3세이다.

표도르 3세(peter III)는 궁중에서 실시하는 제왕학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똑똑치 못한 것이 밝혀지자 신하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제왕 후임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줄 것을 여러번 읍소했지만 모두 무시해 버렸다.

더군다나 1740년 6월에 안나(Anna) 여제가 사망하자 이반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안나 언니의 딸인 레오폴도브나 (Anna Leopoldowna)가 아들인 이반 6세 (Iwan VI)의 섭정을 맡았다. 이반 6세가 이제 겨우 생후 2개월 밖에 되지 않은 젖먹이 애기였기 때문이다.

이반 6세는 안나 여제가 사망하던 해인 1740년 8월에 태어났으니 생후 2개월만에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래서 황제로서의 제관식도 가져보지 못했다.

이반 6세는 러시아 제5대 황제로 소련 역사상 최연소로 즉위한 왕이다. 생후 2개월만에 왕위에 오른 사람은 이반 6세 이외에는 더 없을 지 싶다.

섭정을 맡은 레오폴도브나는 엘리자베스를 수녀원에 감금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이제 32세가 된 엘리자베스도 가만히 당할 수만 없어서 러시아에 대한 독일 프로이센 왕국의 내정 간섭을 배제하고 친오스트리아파와 프랑스왕국과의 외교를 반대하는 귀족들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하면서 정치에 뛰어 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인 귀족들이 러시아에서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이들을 모두 숙청시키고 소련의 전통귀족을 등용시키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사람들은 예의범절을 모르는 무식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왕족들도 마찬가지여서 궁중에서의 법도와 예의범절을 배우기 위해 왕족들을 독일 하노버 근처의 콥펜부뤽게 (Coppenbrügge) 라는 마을로 보내서 왕족으로서의 예의범절과 사회적 도덕성을 배우기 위해 두 달 동안씩 교육을 보냈다.

지금은 그때 당시의 훈련장이 박물관으로 변해서 당시에 교육용으로 쓰였던 교재나 교육 내용 등을 알아 볼 수 있게 했다. 필자가 이 박물관을 둘러보았을 때, 안내자들은 러시아 왕족들이 얼마나 무식에 가깝고 예의범절을 몰랐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엘리자베스는 1741년 11월 25일,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어린 이반 6세와 그의 어머니 레오폴도브나를 모두 감옥으로 보냈다. 이반 6세는 갓난 애기 때부터 감옥소에서 지내다가 23세가 되던 해에 어느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반 6세 황제는 섭정을 잘못했던 어머니 때문에 한 살도 되기 전에 감옥에 감금되더니 마지막에는 자객의 손에 생을 마감하게 되는 데 그는 감옥소를 한 번도 벗어나 보지 못하고 억울하고 비극적인 삶을 감옥소에 보낸 황제였다.

쿠데타에 성공한 다음 날인 26일에 엘리자베스를 따르는 귀족들이 상트 페터스부르크(St.Petersburg) 에서 그녀를 황제로 선포하며 제왕식을 가졌을 때 그녀는 향년 32세였다. 이로서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는 끊어지게 되었다. 제1대 황제 표드르 1세의 혈통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1742년 여제로 즉위한 엘리자베스는 러시아에 문화적 번영의 시대를 열었다. 교육과 예술의 발전을 장려했다. 그녀는 러시아 최초의 모스크바 대학을 설립하고, 예술과 과학을 장려하며, 화려한 궁전을 짓게 했다. 연극과 무도회를 즐겼던 그녀는 점점 사치하기를 좋아했고 유럽 전역에서 비싼 옷들을 사들이면서 국가재정을 악화시켜 파산직전까지 이르게 했다.

엘리자베스는 친독일 성향이었던 안나 레오폴도브나 섭정 때 많은 견제와 압박을 받아 왔었기에 그 영향으로 독일계에 대한 적대감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그로 인해 프로이센 왕국과 서로 안면식도 없었던 프리드리히 2세를 매우 싫어했다.

그녀의 통치하에서 사형 집행하는 재판을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었던 것은 사실상 폐지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로 안정을 가져오게 했으며 포악한 정치보다는 문화예술 발전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대외정책에서 반프로이센 노선을 추구했으며 러시아를 독일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 2세에 맞선 7년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이센 왕국을 이겨보았자 별로 얻을 게 없는 상태였고 러시아군이 프로이센 군대를 물리치고 베를린을 일시적으로 함락시키기도 했지만 러시아가 갖게 된 피해도 막심했다. 즉 러시아의 승리라는 7년 전쟁은 프로이센군이 1/3 정도의 손실을 입었다면 러시아군은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어 버렸다.

세월의 장사가 없듯이 프랑스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을 포함해서 프로이센 제국까지 거의 몰아붙였지만 완전한 승리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1762년 1월 5일 52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나서 조카인 표드르 3세(표도로비치)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로서 로마노프 왕조는 단절되었고 표도르 1세의 외손자인 표도르 3세가 즉위한 것이다. 홀스타인-고드로프-로마노프라는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하고 왕위에 오르지만 6개월만에 일어난 쿠데타로 왕위에서 물러나자 그의 아내인 예카타리나 2세가 즉위하였다. 표드로 3세가 상트페터스부르크를 떠난 틈을 타서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반란의 이유는 고위 귀족자제들로 이루어진 근위대를 홀대하고 실력이나 경험이 없는 자들로 근위대를 재조직해 나간 데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는 로프샤라는 궁전에 감금된 후 8일 만에 사망한 것은 “복통에 따른 급사” 라고 했지만 암살당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1년간 귀한 원고를 연재해 주신 정원교 선생님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편집자

1346호 22면, 2026년 6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