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7일부터 10월 23일까지
정귀남(하이델베르크한인회장)
지난 10월 17일부터 10월 23일까지 대한노인회 독일지회 하영순 회장님의 인솔하에 “제8차 고국 방문 나들이”가 실시되었다. 이번 여행에는 울릉도, 독도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와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10월 17일
독일에서 온 36명과 한국에서 함께하신 분들(미국에서 오신 하 회장님의 언니와 동생분, 그리고 이 대표의 어머님과 친구분 등)을 합하여 총 44명이었다. 그중 7명은 대구에서 승차하기로 되어 있었다. 13시에 서울 잠실 종합 운동장에서 출발한 후 대구로 향했다.
버스출발 후 하 회장님의 인사 말씀을 통해, 이번 여행을 위한 준비는 꽤나 까다로웠고, 그중 크루즈 배를 이용한다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트레블 온(Travel On) 여행사 이정민 대표 소개, 장관철 기사님 소개가 있었으며, 후에는 우리 모두에게 명찰이 주어졌다. 서로 잘 알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기에 명찰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구 도착까지는 약 3시간 정도 필요했고, 그 사이에 하 회장님은 이정민 대표를 유료(有料) 관광 안내자로 자신을 무료(無料)관광 안내자로 재미있게 소개하셨다.
버스 안에서 서로의 소개와 더불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그때마다 하 회장님이 준비하신 수많은 선물이 제공되었다. 앞으로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는 벌금으로 천 원씩 지불하기로 했다. 버스 안에서의 웃음은 대구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행의 첫 코스는 대구의 ‘간송 미술관(澗松美術館)’이었다. 이정민 대표는 미술 작품의 보관에 대한 가치를 말씀하셨다. 예로 폴란드의 Jan Matejko (얀 마테이코)의 그림에 대한 설명이었다. 민족적 자존심을 살리는 그림으로 독일(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이겼던 것을 역사화한 <그륀발트 전투> (1410년, Schlacht von Tannenberg) 그림이다. 폴란드 국립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정의와 항의가 담긴 그림이기에 이것을 독일의 나치시대 궤링(Hermann Göring)은 없애려고 시도했었다고 한다. 나치 선전에 앞장선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이 그림을 찾기 위해서, 그림을 제보하는 자는 이백만 마르크의 상금과 시민권을 준다고 선전을 했었다. 하지만 그림은 이미 성당 지하 땅에 숨겨 두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보존됐음을 알려 주셨다.
미술관을 관람하기 전에, 그림의 예술성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귀한 보배 인가를 설명해 주심으로 미술에 대한 인식과 간송 미술관 관람의 의미를 새롭게 가지도록 해 주었다.
오후 5시경에 대구 간송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는, 대구에서 승차하기로 한 반가운 얼굴의 7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정민 대표는 입장하기 전에 다시 한번 예술을 통하여서 전해지는 민족의 얼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간송 전형필은 거부 집안의 자제였다. 그분이 우리나라 보물을 모으기 시작한 동기는 스승 오세창을 통해서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오세창은 3.1운동 33인 중의 한 명이시다. 간송은, 산골에 흐르는 물 [간]자와 푸른 소나무 [송]을 뜻하며 그의 스승 오세창 선생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한다.
간송은 “문화보국(文化保國)” 즉 문화로 나라를 지켜낸다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에 우리 문화재 들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헌신하신 분으로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을 지켜내신 분이다.
이정민 대표는 동시에 조선 말기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역관 이상적(李尙迪)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역관 이상적은 당시 중인(中人)으로 오늘날의 통역사, 외교관과 같은 일을 하신 분이다.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상적은 중국에 다녀올 때마다 종이와 붓, 벼루를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추사 김정희에게 챙겨 보냈다. 물론 책도 엄청나게 싸 보냈다. 당시의 교통 사정을 생각하면 엄청난 정성이다.
김정희는 감사의 선물로 그가 그린 70cm 족자 ‘세한연후(歲寒然後)’를 주었다. 뜻은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상적(李尙迪)이 ‘세한연후’를 들고 청나라에 나타나자 쟁쟁한 문인들이 모여들어 그림의 여백에 발문을 남겼다. 세한도를 감상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도 남아 있다. 상상만으로도 감동적인 장면이다.
이상적(李尙迪)은 추사의 영향으로 금석학과 고증학에 조예가 깊었고, 한편으로는 박지원, 이덕무 등의 영향을 받아 실학사상에 기초한 사실주의 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상적의 활약은 청나라를 드나들며 빛을 발한다. 청나라의 쟁쟁한 문인 100여 명을 친구로 사귀며 당대의 사상과 정치, 외교, 무역 등 여러 분야에서 폭넓은 교류를 펼쳤다.
이상적의 학문은 조선 말의 개화사상가 오세창의 부친인 오경석을 직접 가르치며 후대로 이어졌다. 같은 역관으로 이상적의 제자였던 오경석이 중국에서 세계지도를 조선으로 가져왔었는데 그때 조선은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라는 사고방식이어서 세계지도를 땅에 뿌려도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을 알리고자 결국은 양반집 자녀들과 사귀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옥균, 서재필 (독립운동가) 등과 사귀면서 세계지도를 알리기 시작했다.

오경석은 흥선대원군의 미움을 받아 49세에 사망했고, 간송의 스승이었던 오세창은 고종의 미움을 받아 일본으로 도망했는데 그곳에서 인내천 (모든 인간은 똑같이 평등하다)을 강조하는 동학의 지도자 손병희를 만났다는 것이다. 이 대표의 진지한 역사적 설명은 흥미로워 모두가 집중하는 자세였다.
간송 미술관의 ‘헬 게이트’(hell Gate)로 알려진 것은, 한국의 모나리자(Mona Lisa)라고 불리는 신윤복의 <미인도>로, 한 점을 단독 공간에 선보였다.
‘미인도’의 고유한 미감에 몰입할 수 있도록 음악과 조명으로 차분한 공간 환경을 조성했다. 작품의 요소인 제화 시와 인장의 시구를 별도로 마련하여 형상과 의미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를 통해 봄기운이 일어나는 화가의 마음을 느껴 보시기 바란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훈민정음해례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책은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세종 28년(1446년)에 만든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 문자의 음가 및 운용법 등의 한문 해설서이다. 미술관의 수많은 보물 같은 작품들을 짧은 시간에 관람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미술관 관람을 마친 후, 저녁으로 준비된 대구 삼계탕은 첫날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반가움이었다. 호텔은 작고 아담한 Toyoko Inn이었으며 방 배정과 함께 일주일간 같이할 룸메이트가 정해졌다.
제2일째, 대구→밀양→부산
조식 후, 약 40분 정도 소요되는 밀양으로 이동, 밀양이라고 하면 ‘아리랑’을 생각나게 하기에, 우리 모두는 버스 안에서 밀양의 홀로 아리랑을 불렀다.

밀양에 도착한 후, 첫 번째로 밀양 명례성당 (密陽 明禮聖堂)을 방문했다. 성당의 위치는, 밀양 시내와는 다소 떨어진 곳으로 낙동강변의 명례강변공원에 있다.
1897년 소금 장수였던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의 생가터 바로 옆에 건립되었으며, 경상남도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성당이라고 한다.
성당은 출입구도 남녀 따로 두었고, 남녀 석이 구분되어 있었다. 내부의 목조 구조는 전국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형태이며, 초기 천주교의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성모승천 성당(聖母昇天聖堂) 안에는 두 번의 태풍에도 나무로 된 성모상이 깨지지 않고 금도 가지 않은 채 잘 보존되어 있는 것에 신자들이 희망을 얻었다고 한다.
이곳은 신석복 마르코의 삶과 순교를 기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을 녹이며 순교한 소금장수 복자 신 마르코의 신앙을 12개의 소금 형상 조형물로 표현했다. 중간에는 유리로 되어 있어 밑에서 보면 유리 천장이다. 순교자의 믿음을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순교탑도 보인다. 이곳에서 우리 모두는 단체 사진을 찍었다.
유독 눈에 뜨인 것은 먹음직스러운 감나무, 석류나무 들이었다. 풍성함을 마음으로 즐기며 사진으로 남긴 시간이었다. 맑은 가을 날씨는 우리들의 여행길을 기쁨으로 이끌어주어 감사하기만 했다.
이곳을 떠난 후, 다음은 유명한 밀양의 만어사(萬魚寺)를 찾았다. 만어사는 가락국 수로왕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불교 조계종에 속하며, 해발 674m에 위치하고 있다. 절 자체보다는 절집 아래에 있는 거대한 너덜바위 지대가 유명하다.
만어산 암괴류는 한반도의 빙하기가 끝난 후, 비가 많이 내리는 과정에서 물리적/ 화학적 풍화 과정을 거치며, 지형이 발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특징적인 지형이다.
만어사에 대한 하나의 전설을 따르면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무척산의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그대와 인연이 있는 터라고 일러주었고, 이윽고 왕자가 길을 떠나니 수많은 고기 떼가 그의 뒤를 따랐다.
길을 가던 도중 잠시 쉬기 위해 어느 한 곳에 멈췄는데 그 순간 용왕의 아들은 돌미륵으로 변하였고, 왕자를 따르던 수많은 고기 역시 굳어져 돌이 되어 일대가 돌밭으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그 머무른 자리가 바로 지금의 만어사 미륵전 자리인데, 미륵전에는 돌미륵이라고 불리는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빛이 비치면 부처상이 보인다고 했다. 나는 아무리 머리를 써 보아도 그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또한 미륵전 아래에는 많은 돌무지가 깔려 있는데 두들겨 보면 맑은 쇳소리가 나서 종석(鐘石)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이들이 경쇠 소리를 내는 신비로운 돌이라고 해서, 나는 이시수와 함께 돌들을 여러 번 두들겨 보았다. 그때마다 소리가 다른 신비로움을 느꼈다. 또 수많은 돌의 모양은 전설 그대로 여러 가지의 크고 작은 물고기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형성되어 있어 이런 전설을 만들어낸 분의 상상력과 지혜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만어사를 방문한 후에 계획은 키스와이어(KISWIRE; K- Korea, I- Iron(철), S- Steel (강), 강철로 와이어(wire)를 용접하는 교량 공장) 고려제강 기념관과. 동백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붙은 이름이라는 해운대 동백섬(海雲臺冬柏島), 그리고 누리마루 (NURIMARU APEC) 하우스로, 2019년 한국 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장소로 이용된 회의장인데 이 3곳은 다음 일정인 한독문화교류협회의 초대로 인하여 시간상 관람하지 못했다.
버스는 부산 해운대에 도착했다. 해운대란 이름은 통일신라 시대 말 문인 최치원이 현재의 해운대 해수욕장 근처를 방문했다가 소나무와 백사장이 어우러진 이곳의 경치에 감탄해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을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한독문화교류협회의 초대가 있었다.
“대한노인회 독일지회 회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LIDO- Korea 임직원 일동”이라는 현수막을 벽에 걸고 환영해 주었다. 해운대 해양대학생들의 음악연주가 있었으며, 다음으로 대학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들의 질문은, 독일에서의 첫 생활에 대한 궁금증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적응했는지, 또 얼마나 힘들었는지 등, 그리고 하 회장님을 비롯한 몇 명이 이 질문에 답을 해 주셨다.
교류협회는 우리를 뷔페식당으로 저녁 식사를 초대했다. 이곳에서도 학생들이 우리와 같이 앉아 계속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엄청난 음식이 뷔페로 제공되었는데, 나만의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많은 음식이 남으면 다 버린다’고 하는데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둘째 날에도 Toyoko Inn 호텔에서 숙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