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를 위한 파독 간호사의 일기장

“〔…〕나의 미래는 복이 있는 여자, 유복녀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할 것이다. 어머니의 과거는 시대가 만들어낸 가슴 아픈 상처일 뿐이라고. 그리고 기분 나빴던 한날의 악몽에 불과하다고.”

1972년 5월 30일, 파독 간호사 현자의 일기장 내용이다. 현자는 그리움과 기억을 일기장에 차곡차곡 담는다.

파독 간호사 현자를 위시한, 그녀의 전과 후세대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옥비녀>가 12월 13일 베를린 공연장에서 막을 올렸다. 이날 100여 명의 관객들이 뿜어낸 호흡의 열기로 베를린의 겨울이 후끈거렸다.

이 연극이 가지는 잠재력은 시대를 초월해 공감을 끌어내는 데 있다. 각자의 이야기는 제각각 막 속에 존재하다 마지막에 비로소 완성된다. 이 연극을 관통하는 기본 테마는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향수다. 반짝이는 사랑은 아니지만 신파조의 낭만도 있다.

1막은 현실과 환타지를 넘나든다. 무대 오른쪽엔 현실이다. 현자의 장례식이 펼쳐지고, 왼편의 현자는 기억 저편의 모습이다. 조명과 음악을 통해 공간과 시간을 분리시킨다. 오른쪽 무대에서 아리랑 바이올린 음악이 들려오고, 음악이 멈추자 조명은 현자에게로 옮겨진다. 아리랑 노래를 흥얼거리는 현자는 한 많은 우리 역사를 표상한다.

상처받은 심장을 밟고 일어서서 민주주의를 만들어냈고, 그 이면에는 장렬한 대중의 피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폭력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저항정신이 있었다. 민초들은 길이 끝날 때까지 아픈 곳을 밟아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자는 누군가가 살지 못한 날까지 견뎌냈다. 파독 간호사 현자는, 바로 파란을 겪었던 시간이 낳은 시대정신이다.

이 연극은 각각의 막이 끊어지는 듯 연결된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각각의 서사를 치밀하게 들여다본다. 물론 100년의 우리 근현대사를 짧은 시간에 보여주기에는 해명되지 않은 의문점을 낳는다. 하지만 관객에게 굳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극 전체의 흐름은 관객에게 공감의 창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우리 민족의 DNA 속에 존재한 정신의 덩어리들이 관객과 배우를 하나의 세계로 이끈다. 관객 중 누군가는 청춘을 소환했고, 누군가는 이미 떠나버린 어머니를 맞이하고 눈물을 쏟아낸다. 그리움, 고향, 향수의 이면에 상실과 거부, 금기와 욕망으로 점철된 우리 역사를 투영한다. 때론 외면하고 싶은 사실까지 직시하고 통찰하라고 다그친다. 준서의 증조할머니인, 위안부 홍이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욕정의 희생양이 되었던 홍이는 딸 현자를 위한 사랑만이 구원임을 믿고 세상을 이겨냈다.

우리의 지나온 100년의 역사는 비상구 없는 매트릭스 같았다. 해방과 탈식민주의는 다른 힘의 권력에 지배당했다. 그 안에서 대중의 삶에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겼다. 하지만 연극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4세대 준서를 통해 미래를 품는다. 준서가 학교에서 옥비녀를 실수로 깨뜨리고, 이후 다시 잇고자 하는 시도는 두 동강난 조국을 통일로 이끌고자 하는 다음 세대의 다짐을 상징한다.

지금 현 세대가 기름지고 풍요롭다고 해서 행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세대마다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다. 오랜 시간 우리 민족의 영혼 속에 내재된 존재의 불안감은 어디서 태생하는 것일까? 답이 없는 질문은 이어진다. 홍이, 현자로 이어지는 어머니라는 이름. 그 어머니의 부재는 바로 나 자신 실존의 불안을 의미한다.

이번 연극의 배우는 만 6세부터 80대까지 다양하다. 파독 간호사 출신 7명과 청년배우 1명, 청소년 배우 4명, 어린이 배우 2명, 까메오 출연 1명까지 총 15명의 배우가 열연했다. 연극의 시작, 장례식을 상기시키는‘지전무’(춤: 박화자)는 고요하고 은은한 춤사위로 생(生)과 사(死)의 경계를 허문다.

2막의 독일병동 장면은 유쾌하기 그지없다. 파독 간호사들의 발랄한 청춘이 그대로 녹아난다. 4막에서는 위안부 홍이와 조태구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현자의 출생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은 청년세대가 열연했다. 연출의 극대화를 위해 그림자 배경을 삽입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표현했다.

마지막 6막 2장은 안나 갤러리에서 옥비녀 전시회를 기획하는 현자의 딸 지숙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번 연극을 담당한 신예은 연출가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배우의 몸놀림까지 섬세하게 터치하며 짧은 연습시간임에도 극의 내러티브를 풍부하게 구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한편 한독문학공간(KD_ Litkorea)의 주관으로 열린 이번 연극은, 베를린 한인회, 베를린 간호요원회 등 한인사회의 관심과 협력을 받았다. 2026 년 파독 간호사 60주년 기념을 위한 준비공연으로 올려졌으며, 앞으로 연극의 열기는 계속될 예정이다.

기사제공: 한독문학공간

1392호 13면, 2024년 12월 27일